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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면 떠오르는 소녀들

namsarang 2011. 2. 17. 23:21

[동아광장/신의진]

2월이면 떠오르는 소녀들

 

신의진 연세대 의대 교수

해마다 2월이 되면 마음이 스산해진다. 2006년 동네 신발가게 주인에게 성폭행 당한 후 살해되어 전 국민을 경악시킨 ‘용산 허 양’(당시 11세) 사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올해 2월 22일에도 허 양의 기일을 맞아 ‘아동 성폭력 추방의 날’ 행사가 열린다.

허 양 사건 이후 정부가 대책을 쏟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이 성폭력은 되레 늘고, 잔혹성도 더해만 간다. 허 양 사망 이듬해 제주 양지승 어린이가 집행유예로 풀려난 성 범죄자에게 살해됐고, 같은 해 12월 안양의 예슬이·혜진이가 성도착자에게 유괴 살해되었다. 급기야 2009년 전 국민을 경악하게 한 ‘조두순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고 연이어 부산 여중생 성폭력 살해사건, 대낮 초등학교에서 유괴돼 성폭행 당한 ‘영등포 초등학생 사건’ 등 하루가 멀다 하고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조두순 사건의 피해 어린이 ‘나영이’는 전 국민과 각계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극복하고 잘 자라고 있다. 그리고 이달 10일 이 사건과 관련해 정부 대책의 문제점을 가리는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 판결이 있었다. 재판부는 나영이가 겪었던 아픔과 고통에 국가의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다. 소송을 진행하기 전 많이 망설이고 괴로워하던 나영이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딸의 고통을 이용해 배상금이나 바라는 몰염치한 부모로 비칠까 봐 끝까지 망설이던 아빠의 눈에는 눈물이 어렸다.                                                   

아동 성폭력 연이어 발생하는데

하지만 나영이가 겪었던 고통을 다시 다른 아이들에게 주지 않기 위해 용기를 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결심하고 모든 처리 과정에서 문제점을 짚어봤다. 초기 진술 단계의 문제, 경찰, 병원, 해바라기센터 간의 연계가 잘되지 않아 정신과 치료가 늦어진 점, 가해자 조두순은 국가가 변호해주고 정작 피해 어린이는 외면되었던 현실 등을 듣자면 정부가 겉으로 요란하게 내세우는 각종 대책 중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는 ‘문제 종합선물세트’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기에 자식 가진 부모들은 정부의 대책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재 여성가족부가 아동 성폭력 사건에 대한 주무 부서이고, 겉으로는 각 부서와 협력해 효율적인 통합 서비스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 기능을 보면 전혀 통합되지 못하고 당한 아이와 부모들 가슴만 멍들게 하는 현실이므로, 나영이 아빠가 용기를 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하는 데 이르렀다.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자 조두순 사건을 계기로 2010년부터 대한변호사협회 주관 아래 의료, 복지, 법률, 교육 등 각 분야 전문가가 모여 전국 어린이 성폭력 사건 중 어려운 사례에 대해 조언하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지원금을 주는 ‘청아랑(청소년아동사랑위원회)’을 운영하고 있다. 실제 지원 사례를 보면 나영이보다 훨씬 더 처참한 상황에 놓인 아이들이 대부분이며, 현 제도는 이들을 돕기에 역부족이다. 청아랑의 사례를 분석해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쪽으로 제도를 대폭 수정하는 일이 진정 성폭력 피해 어린이를 위한 길이 아닐까.

 

어린이 성폭력 현장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피해 어린이들을 중심으로 모든 서비스가 통합돼 제공되는 것이다. 각 정부 부처 중심의 서비스를 피해자가 찾아 돌아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어린이 성폭력과 관련해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가해자 처벌 강화 쪽으로 이루어지고 피해 어린이를 진정으로 위하는 지원은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현실은 수사 단계에서부터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 어렵고 심지어 충격으로 기억을 떠올리기 어려운 아이가 새벽까지 조사를, 그것도 반복적으로 받을 가능성이 아직도 크다. 더구나 가해자가 친족이면 ‘너만 입을 다물면 된다’는 주변 사람들의 압력으로 인해 피해자가 가해자 취급을 받기도 한다. 열악한 환경의 피해 어린이들이 많아 치료실까지 데리고 오는 것조차 어려운 경우가 다반사다.

피해 어린이 지원은 아직도 부족

다행히 박민식 국회의원의 주창으로 ‘범죄피해자 보호기금법’이 통과돼 금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 기금은 강력 범죄, 성폭력 범죄 외에 다양한 범죄의 피해자들이 치료 받고 자활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기금이다. 현재 이 기금은 법무부 책임하에 쓰이도록 되어 있으나 그동안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원해오던 예산과 아동학대 피해 어린이를 돕는 예산 등도 지원하게 돼 있다. 제대로 운영하면 통합적이고 효율적으로 모든 범죄 피해자가 지원받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끔찍한 어린이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잠시 주목을 끌다가 흐지부지 끝나던 과거와는 달리 체계적인 계획 아래 발전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게 됐다. 이 기금이 성폭력 피해 어린이들이 통합적인 서비스를 제대로 잘 받을 수 있는 희망의 기금으로 발전하기를 소망한다.

                                                                                                                                                                                               신의진 연세대 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