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
중국이 북한 생명줄 놓는 날
“깨끗하게 단념하시오(cut and cut cleanly).”
1986년 2월 필리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몰락을 상징하는 유명한 발언이다. 마르코스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특사로 마닐라를 방문했던 폴 렉설트 미 상원의원에게 오전 2시에 전화를 걸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도움을 요청했으나 렉설트는 냉정하게 권력을 내놓고 떠나라고 몰아붙였다. 렉설트는 한 시간 뒤 마르코스에게 “레이건 대통령도 당신의 하야를 원한다”고 통보했다. 미국과 연결된 생명줄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마르코스는 21년간 집권했던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 하와이 망명길에 올랐다.
장기독재 언젠가 버림 받는다
마르코스 퇴진으로 미국은 많은 것을 잃었다. 미군은 1991년과 92년 클라크 공군기지와 수비크 만 해군기지를 차례로 넘겨주고 필리핀에서 철수했다.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졌다. 미국은 필리핀 국민의 민주화 요구와 세계 경영 차원의 장기독재 지원을 놓고 고민했지만 결국 마르코스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이집트 독재정권 포기도 비슷한 맥락이다. 미국은 친미, 친이스라엘 정책을 추진한 호스니 무바라크의 30년 독재를 지원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초기인 2009년 6월 카이로대 연설에서 “이슬람 국가들의 미래를 위해 민주주의가 중요하다. 표현의 자유, 정직한 정부, 선택의 자유 등 민주적 가치를 옹호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오바마의 민주주의론은 거창했지만 이란과 시리아 등 반미 성향의 국가들을 겨냥한 것일 뿐 이집트는 대상이 아니었다. 오바마는 전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에 매년 15억 달러를 원조하며 무바라크 정권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 그는 2010년 11월 이집트 총선에서 자행된 부정도 못 본 체했다.
오바마는 미국의 국가이익과 민주화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이집트의 반독재 시위에 대응했지만 종착역은 독재자 포기였다. 무바라크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나온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의 사임 임박 발언은 렉설트 상원의원의 통고가 마르코스에게 준 것 같은 결정타였다. 미국이 끝까지 무바라크를 지지했다면 이집트 시위대의 구호는 반미로 바뀌었을 것이다. 차기 이집트 정부가 아랍 세계에 반미 열풍을 확산하는 진원지로 변하는 끔찍한 시나리오보다는 무바라크 퇴진이 미국에는 훨씬 쉬운 선택이었다.
북한 정권의 유일한 생명줄은 중국이다. 미국의 무바라크 포기를 보며 북한의 후견국인 중국이 김정일을 버릴 수 있을지를 생각해본다. 가능성은 있다. 소련도 미국이 필리핀과 이집트 독재자를 포기한 것처럼 붕괴 위기에 몰린 장기독재에 등을 돌린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1989년 10월 7일 동베를린에서 동독 건국 40주년 기념연설을 하며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에게 “개혁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고르바초프는 동독 주민들의 대량 탈출과 개혁요구 시위 진압을 위해 동독 주둔 소련군을 개입시킬 생각이 없다는 말도 했다. 결국 호네커는 열흘 뒤 사임했고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북한도 이집트처럼 할 수 있다
중국은 무바라크의 몰락을 모르는 체하고 있다. 중국이 외면한다고 독재를 거부하는 물결이 북한을 피해 가지는 않을 것이다. 동서 진영 독재자의 몰락 역사를 보면 중국이 북한의 생명줄을 놓을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는 희망이 생긴다. 중국이 김정일 지지보다 그가 떠난 뒤 북한과의 관계에서 얻을 게 많다고 판단하는 날이 그날이다. 북한 주민은 중국의 태도가 변할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면 된다. 북한 주민도 필리핀 이집트 동독 국민처럼 할 수 있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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