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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의 魂은 숨쉬고 있었다

namsarang 2011. 3. 5. 17:59

[커버스토리]

자수의 魂은 숨쉬고 있었다

 

■예원 손인숙 씨의 자수와 삶

 

 

 

40여 년간 묵묵하게 자수에 열정을 쏟아온 예술가 손인숙 씨가 서울 강남구 개포동 자신의 아파트에서 자수를 놓고 있다. 벽에 걸린 작품은 손 씨가 자주 걷는 서울 대모산 숲길을 자수로 표현한 것. 그가 수를 놓고 있는 작품은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드는 ‘섭리’ 시리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지난해 12월 초대를 받아 간 그곳은 별천지였다.
예원 손인숙 씨(61)가 안주인인 서울 강남구 개포동 195m²(59평)짜리 아파트는 사실상 박물관이었다.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 신윤복의 미인도, 경북 청도의 운문사 비로전, 서울 대모산 숲길 등 옛것과 지금 것이 ‘자수’로 거듭나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불화, 흉배, 보자기, 장신구, 목가구 등 손 씨가 자수를 놓은 분야는 21가지나 됐다.

‘섭리’란 제목의 그의 자수 작품 앞에선 할 말을 잊었다. 명주실의 보풀거리는 질감과 역동적인 움직임은 자연이 ‘학학’대는 숨결을 그대로 전하고 있었다.

“밑그림을 그려 수를 놓았습니까”라고 묻자 손 씨는 “아니요. 젊은 시절엔 그렇게 했는데 이젠 바늘이 절로, 그리고, 실이 절로 채색합니다”라고 답했다. ‘자수 달인’의 경지였다.

그의 이어진 말. “인간의 만남과 사랑, 끝없는 삶의 대화, 인간과 신의 섭리를 환상적 기법으로 표현한 겁니다.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든 거죠. 저는 사진을 사진으로만 보지 않고, 흉배(조선시대 왕과 왕세자, 문무백관이 입는 관복의 가슴과 등에 장식한 표장)를 흉배로만 보지 않아요. 단순 기능인이 못하는 예술세계를 상상력으로 이루고자 합니다.”

이화여대 자수과(현 섬유예술과)를 나와 지금껏 5000여 점의 자수 작품을 완성했다는 그는 존재의 근원적 의미를 파고들고 있는 듯했다. 반짝이는 흉배 자수 작품은 ‘한국의 스와로브스키’ 같았다.

                                                                                                                                                                           손인숙 씨의 작품인 ‘조가비 열쇠꾸러미

손 씨는 젊은 날엔 매스컴에 종종 나왔지만 “(밖으로 떠벌리면) 나 자신이 사라질까 두려워 20여 년간 언론에 나오지 않고 작품 활동에만 매진해 왔다”고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이곳을 찾아와 “한 땀 한 땀 떠내려간 정성이 기적을 이뤘습니다”라고 방명록에 썼다.

그의 ‘자수 미학’을 기사로 옮긴다는 건 내심 부담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끌고 해를 넘기는 동안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임권택 감독, 허영만 화백 등이 다녀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지난달 23일 다시 이곳을 찾아가 손 씨와 반나절 동안 인터뷰를 했다. 이날엔 박은주 김영사 사장, 김희진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과 교수 등도 발걸음을 했다. ‘개인이 가진 것(돈과 재능)’을 ‘한국의 자랑스러운 문화’로 바꿨다는 한 예술가의 집념이 지금 우리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고 있다.

○ 역발상의 예술가

그의 작품은 신선하다. 뭐든 뒤집어 생각하는 역발상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우리 전통의 재현’은 옛것을 고스란히 베끼는 게 아니란다.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언어로 바꾸는 작업이란다.

‘왜 우리 전통 귀주머니엔 손잡이가 없을까?’란 아쉬움으로 실크 손잡이를 달았더니, 멋스러운 한국의 핸드백이 됐다. ‘예술엔 남녀가 공존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여성의 노리개에 남성의 전통 흉배 장식을 했다. 나무 탁자의 윗면에는 홈을 내서 그 속에 각종 장신구를 전시하고 유리를 덮었다. “한 가지 용도로만 쓰기엔 아깝잖아요. 이렇게 전천후로 한국의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걸요.” ‘한국의 보자기는 꼭 정사각형이어야 하나?’라며 매듭을 곁들인 직사각형 보자기도 만들었다. 늘 스스로에게 “왜 그러면 안 되나?”란 질문을 던졌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바늘이 절로 그리고, 실이 절로 채색하는···

 

5000여점의 작품엔 ‘忍苦의 삶’이 오롯이

 

①수 문살문 자수. ②금은사 단호흉배 자수. ③서울 대모산 숲길 자수. ④손인숙 씨(가운데)가 임권택 감독(왼쪽) 등 손님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⑤‘섭리’ 시리즈. ⑥신윤복 미인도 자수. ⑦격자매화 꽃살문·빗살문 자수. ⑧문살 수 보자기 자수. ⑨전등사 대웅보전 안쪽 공포 자수 . ⑩손인숙 씨가 지난해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를 맞아 만든 G20 국기 자수.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그는 자수 작업에 협업 시스템을 도입했다. 자수, 조각, 옻칠 등 그가 ‘지휘’하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장인이 수십 명이다. 그래서 작품의 틀인 액자에도 공을 들일 수 있었다. “왜 프레임(틀)은 ‘엑스트라’여야만 하나요? 엑스트라도 주인공이 될 수 있잖아요.”

인천 강화군 전등사 대웅보전 닫집봉황(보물 178호)을 수놓은 작품은 호두기름을 바른 나무 액자에도 조각을 한 뒤 수를 놓았다. 액자에 수를 놓은 것이다. 한국 전통 가옥의 창 이미지로 꾸민 액자, 물푸레나무의 아름다운 결을 그대로 살린 액자도 있다.

‘화성능행도’(보물 1430호)를 자수로 표현한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행차한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손 씨는 이 그림을 자수로 재현하면서 그림 속 다양한 인물 군상을 매듭 장식으로 따로 만들어 나무 액자 옆에 매달았다. 그래서인지 역사 속 인물들이 액자를 뚫고 튀어나온 것 같았다.

○ 자수로 알리는 한국 문화

평생 작품을 판 적이 없다는 그는 청와대와 국립민속박물관 등에 일부 작품만 기증을 해 왔다. 올해 5월엔 지인의 소개로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박물관과 국회의사당, 국무부에 그의 자수 작품들을 기증할 예정이란다. 우리의 소중한 국보와 보물, 고서화가 자수로 거듭나 미국 정가의 심장부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손 씨는 “오랜 세월 수놓는 고통을 벗 삼아 즐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195m²(약 59평) 아파트 두 채, 경기 용인시 죽전의 294m²(약 89평) 아파트 두 채 등 총 네 채의 아파트에 작품 5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장인 수십 명을 움직이며 마음껏 자수 작업을 해왔던 데엔 알고 보니 남다른 ‘외조’도 있었다. “남편이 수원극장 등 여러 사업체를 갖고 있어요. 결혼하고부터 지금까지 제 자수 작업엔 ‘노터치’였죠. 그동안 수백억 원의 돈을 한국의 문화로 바꿔왔다고 보시면 돼요.”

 

손 씨의 자수 인생은 교사였던 어머니 이경수 씨의 영향이 컸다. 솜씨 좋던 어머니의 자수를 열 살 때부터 어깨 너머로 배우고 자란 것이다. 그의 자수를 성장시킨 건 뜻밖에도 역경이었다. 한국은행에 다니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살림이 어려워졌다. 이화여대 시절 유복한 학생들이 내다버린 실을 주워와 서울 미아리 단칸방에서 밤새 손으로 꼬았다. 전통자수는 꼬아 만든 실인 ‘꼰사’를 주로 사용한다. 자수과 수업시간 다른 학생들이 실을 꼬는 동안 그는 이미 집에서 만들어온 꼰사로 남들보다 빨리 수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힘겨웠던 날들을 떠올리며 평생 승용차를 산 적이 없다. 그의 남편도 수년 전 업무용 차를 처분했다. 최근 결혼한 큰딸은 부모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손수 간소한 혼수를 장만했다고 한다. 버는 돈은 오로지 자수 작업에만 썼고, 두 딸도 이런 부모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며 독립적으로 자랐다는 게 손 씨의 설명이다.

손 씨는 서울 강남구 자곡동에 자수박물관을 세우려고 한다. 10여 년 전부터 갖게 된 소망이다. “제대로 숲을 이뤄 놓으면 호랑이가 찾아오지요. 젊은 세대들이 누구나 박물관을 찾아와 우리 문화를 누렸으면 합니다. 고통을 즐길수록 욕심을 버려야겠다는 깨달음이 들었어요. 내 것을 사회에 환원하는 삶이야말로 ‘넉넉한 가난함’ 아닐까요?”

임권택 감독이 손 씨의 집을 찾아와 남긴 방명록 내용은 이랬다. “놀랍습니다. ‘화석이 돼 가는구나’ 개탄했던 우리의 자수문화가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네요. 큰 존경을 보냅니다.”

불타 버린 숭례문의 단청이 그의 집엔 있다. 그가 10년 전 만든 자수다. 그동안 우리는 남의 나라 명품, 남의 나라 장인만 떠받들진 않았나. 고통을 즐겼다는 손 씨의 자수 한 땀 한 땀에 쓸쓸한 외로움은 없었나. 그의 집을 나서면서 불현듯 미안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