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옛날 시골의 한 아낙이 시장에 가서 자식들이 좋아하는 떡과 여러 가지 물건들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목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호랑이는 늙은 데다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해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잡아먹자고 덤볐다가는 실패할 것이라 여겨 그 아낙네 앞으로 나가 "어흥~"하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하고 말했습니다. 아낙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것보다는 떡을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귀한 떡을 호랑이에게 줬습니다.
한참 후 그 아낙이 개울을 건너려고 하는 데 그 호랑이가 또 나타나서 "팔 하나만 떼어 주면 안 잡아먹지"하자 그 아낙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것보다는 팔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팔을 하나 떼어 호랑이에게 줬습니다. 그리고 언덕을 넘어가는 중에 호랑이가 또 나타나서는 나머지 팔 하나를 요구했고 아낙은 나머지 팔 하나를 잘라 줬습니다.
그 호랑이는 다음 언덕에서 다리를 요구했고 아낙은 다리를 하나 줬습니다. 외다리로 간신히 그 다음 언덕에 도달했을 때 호랑이는 남은 다리 하나마저 요구했고 아낙은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나머지 다리까지 떼어 주었습니다.
이제 팔과 다리를 다 잃은 아낙이 데굴데굴 굴러 언덕을 내려오는데 밑에서 기다리던 호랑이가 "네가 처음에 떡을 안 주고, 한 팔을 안 주고, 나에게 대들었으면 나는 힘이 없어서 도망갔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이제 팔도 다리도 없으니 아무런 힘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이제 너를 통째로 다 먹어버리겠다"하고 말하고는 그 아낙을 통째로 삼켜버렸답니다. 그 아낙은 하나하나 야금야금 양보하다가 끝내는 몸 전체를 양보하여 목숨까지 잃은 것입니다.
사순절 첫 주일인 오늘 우리는 복음말씀에서 예수님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이겨내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40일이나 굶어 배고파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도 빵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온 세상 부귀권세를 다 준다고 해도 불의와 타협하라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면, 죄로 유인하는 유혹을 물리친다면 죄를 원천적으로 차단해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한번 뿐이야', '여기까지야', '앞으로 더 이상은 아니야', '남들도 다 하는데 뭘', '주일미사에 한번만 빠지지', '다음부터는 아니야.'
냉담교우들 중에도 처음부터 냉담할 생각으로 주일미사에 빠진 신자는 없습니다. 주일미사를 한번 빠지고 두 번 빠지다보니 마침내 냉담교우가 된 것이죠. "한 번 쯤 빠지는 건데 뭘"하며 빠진 게 냉담하게 될 줄이야.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했든가요? 처음부터 소를 훔칠 소도둑이 될 줄은 자신도 몰랐습니다. '바늘 하나쯤이야'하고 하나하나 양보하다가 마침내 소까지 훔치게 된 것입니다. 흉악한 범인이 처음부터 흉악범이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극악무도한 살인강도가 처음부터 살인강도 되려고 마음먹었던 것도 아닙니다. 양심에 꺼리는 것을 하나하나 양보하다가 마침내 양심 전체를 팽개치는 중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은 흉악한 범죄자도, 살인강도도, 소도둑도, 그리고 냉담교우도 되지는 않았습니다. 아직은 의인이고 선인에 속합니다. 그러나 양심을 하나하나 양보하고, 하느님 가르침을 조금씩 양보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양심적인 사람으로, 냉담교우로, 하느님과 멀어진 사람으로, 그리고 악마의 유혹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죄인으로 타락할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큰 것을 유혹하지 않습니다. 큰 죄를 지으라고 유혹하면 우리가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을 잘 알기에 간교한 악마는 작은 것부터 유혹합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부터 유혹해서 하나하나 야금야금 조금씩 아주 조금씩 양심을 갉아먹고 정의를 양보하라고 유혹을 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유혹을 이기신 예수님을 흉내 내고,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을 따라 함으로써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말고 단호히 물리칩시다.
"사탄아, 물러가라"(마태 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