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市長에 수갑 채운 美공권력의 권위

namsarang 2011. 4. 14. 23:31

[시론/조지형]

市長에 수갑 채운 美공권력의 권위

 

 

전화를 받자마자 선배 교수가 대뜸 묻는다. “현빈 좋아해?” 두서없는 질문에 꼬리를 흐리면서 “글쎄요”라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물었다. “아니, 네 휴대전화 컬러링이 현빈의 노래여서!” 맞다. 내 휴대전화의 두 개의 컬러링 중 하나는 ‘그 남자’다.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현빈이 최선의 삶을 실천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주었기에 잠시나마 ‘그 남자’를 음미하고 있다.

미국 법제사를 전공하는 까닭에 어떻게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법치국가가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법치의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사회지도층의 솔선수범이 없다면 법치는 불가능하다. 여의도에서 난투극이 끝나지 않고 대통령이 새해예산안의 강행처리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이 나라에서는 법치가 제대로 실현될 수 없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예산안 처리를 1시간 남겨두고 자신의 정책을 포기하면서까지 여당과 타협하지 않았던가.

근대 시민혁명으로 법은 절대자가 되었다. ‘왕은 법’이라는 통치원리가 ‘법은 왕’으로 바뀐 것이다. 이제 법은 왕이지만 입법자는 왕이 아니다. 그런데도 입법자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착각과 욕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난투극을 벌이는 그들에게 법치란 국민 위에 군림하는 수사(修辭) 전략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다. 오래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부는 법의 노예다. 그러면 그 시대는 희망으로 가득 차고 사람들은 신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고 했다.

두 번째 대답은 법의 현실성이다. 법에 대한 존경과 법의 현실성은 동전의 양면이다. 하나가 없으면 다른 하나도 사라진다. 최근 KAIST에서 최우수교수상을 수상한 저명한 생명과학자가 연구비 유용 문제로 극단의 길을 선택했다. 국가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연구실 운영비를 책정할 수 없게 만든 비현실적 관리 규정이야말로 연구비 유용을 부채질하는 주범이다. 법의 현실은 관리자가 아닌 국민의 현실이어야 한다.

법의 현실성 문제는 국가의 운영 방식에도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예를 들면, 집권 초에 이명박 정부는 임기제로 보장된 여러 사람들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리에서 내쫓았다. 사실 이전 정권도 모두 그렇게 했다. 차기 대통령도 그렇게 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모두 대통령 임기와 함께하는 임기제로 바꾸자. 그 대신 인사청문회를 도입해서 능력과 자격이 있는 사람을 임명하면 된다. 국회의원들이 대선주자의 법치 이미지 훼손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지금이 오히려 적기(適期)다.

마지막 대답은 시민의 덕성(德性)이다. 법은 성격상 ‘있는 자’의 이익을 도모하기 십상이다. 있는 자는 목소리도 크고 네트워크도 튼튼하다. ‘법의 정신’에서 몽테스키외는 “모든 시민은 마치 주인집을 도망쳐 나온 노예와 같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법에 의해 해방된 노예는 이제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욕망한다. 법을 통해 평등을 쟁취한 사람이 이제 법을 악용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탐욕을 경계하고 견제하는 덕성이 없다면 법은 항상 권력자의 편에 선다.

 

그래서 ‘법의 정신’이 정작 강조하고 있는 것은 법치(法治)가 아니다. 몽테스키외는 공화국의 통치원리는 법이 아니라 덕성이라고 역설한다. 애국심, 공익을 위한 사익(私益)의 희생, 진정한 영광의 희구, 법질서에 대한 순종 등의 덕성이 필요하다. 연좌시위로 수갑을 차게 된 빈센트 그레이 미 워싱턴 시장의 모습(동아일보 13일자 A2면)에서, 성역 없는 준법정신과 공권력의 권위는 아이러니하게도 지위상 주지사에 버금가는 시장임에도 묵묵히 체포돼 경찰서로 따라가는 그의 순종의 덕성으로 더욱 빛을 발했다.

                                                                                                                                                                                   조지형 이화여대 교수 미국법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