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참고

[스크랩] ○ 한국 주화의 변천사

namsarang 2011. 4. 18. 20:40

  
건원중보(앞면)                  건원중보(뒷면)

성종15년(996년)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乾元重寶(건원중보) 뒷면 東國(동국)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화로 알려져 있다. 건원중보는 중국의 당 숙종 2년 (759년)부터 주조된 엽전인데 중국의 건원중보와 구별이 어려워 상, 하부에 "東國"자를 앞면으로 내어 동국중보를 만든 것이 우리나라의 이름을 가진 최초의 주화가 되었다.

은을 재료로 하여 우리나라 지형을 본 따 만든 소은병
1101년 고려 숙종은 은 1근으로 우리나라 지형을 본 따 만든 은병을 발행하였다. 은병 1개의 가치는 포목 100필에 해당하는 고액으로 주로 국가간의 교역에 사용되었다. 그 후 은의 조달이 힘들어 지고, 동을 혼합한 위조가 성행하자 1331년 은병의 크기를 크게 축소한 소은병을 발행하였으나 이 역시 위조가 나돌아 화폐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어 1408년 유통이 금지되었다.

정확한 양의 순은으로 만들어 교환과 가치저장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칭량화폐

성종15년(996)에는 거란의 침략을 받아 사회가 불안정했던 시기였지만 겨우 무문철전을 주조할 정도로 문화수준이 낮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무문전은 성종 15년 철전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려 고분에서 출토된 무문철전과 무문동전은 유통수단으로서 제조된 것이 아니라 부장용(副葬用)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로부터 숙종대에 이르기까지 東國通寶(동국통보), 삼한중보(三韓重寶), 三韓通寶(삼한통보), 海東重寶(해동중보), 海東通寶(해동통보), 海東元寶(해동원보) 등 8종이 주조되었으며 읽는 방법이나 서체를 세분하면 약 100여종에 이른다. 또한, 동전의 명칭에 三韓, 海東, 東國 등은 우리나라의 부르는 이명이나 별호로써 중국과 일본의 것과 구별된다.
조선왕조에서는 '조선통보', '십전통보', '상평통보'를 발행하였다. '조선통보'는 세종 5년(1423)에 해서체로, 인조 11년(1633)에 8분 서체로 각각 발행하였으며, '십전통보'는 효종 2년 (1651)에 발행되었다.
조선시대의 화폐를 대표할 수 있는 '상평통보'는 숙종 4년(1678) 이후 고종 25년(1888)까지 200여년동안 주전소(鑄錢所), 전가(錢價), 서체(書體), 부호(符號), 천자문순(千字文順), 숫자순, 오행순(五行順) 등으로 나뉘어져 약 3000여 종류가 발행되었다.


세종 5년(1423년)조선시대 최초의 동전인 '조선통보'의 발행을 보게 되었다. 정부는 조선통보의 유통을 촉진하기 위하여 '조선통보 전용령'을 공포하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하였으나 잘 유통되지 않았고 면직물류의 포화가 주로 유통되고 있었으며, 소액 거래에는 미두(米豆)가 사용되었다.


효종 2년(1651) 7월 우의정 한흥일의 건의에 따라 민간에서의 사주전(私鑄錢)이 허락되었으며 같은 해 11월에 화폐유통을 적극 장려할 목적으로 '행전사목(行錢事目)'을 제정 실시하였는데 그 방법의 하나로 백성들이 동전 50문씩 지니고 다닐 것을 의무화하였다. 이상의 사주전허락은 50문씩 동전을 지니고 다녀야 되는 의무수행에 따른 불편을 덜기 위하여 '십전통보(十錢通寶)'를 주조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고종 19년 (1882년)
대동전 청색칠보 3전

서기 1651년,1735년, 1792년 설
십전통보

 인조 11년 (서기1633년??)
조선통보  3전

 대조선개국 495년 (서기1886년)
10환 경성전환국 제조

 대한제국 광무 5년 (서기1901년)
독수리 반원

 대한제국 융희 3년 (서기1909년)
봉황새 1전

 

 

 고종 3년 (서기1866년)
상평통보 당100전

 숙종 5년 (서기1679년)
상평통보 당2전

숙종 4년 (서기1678년)
상평통보 당1전

첫째, 화폐가치를 정하여 미곡 1되를 동전 4문으로 하고 때와 장소에 따라 어느정도의 신축성을 인정하였다.
둘째, 각사의 수속(收續), 면천(免賤), 노직공명첩(老職空名帖)을 모두 동전으로 대납하게 하였다.
세째, 시장에서의 모든 거래에 대하여 동전을 매개로 하여 교환하도록하였다.
네째, 민간인이 원하는때 상평청은 미곡과 동전을 자유로이 교환해 주도록 하였다.
1966년 한국조폐공사기술에 의해 십원, 오원, 일원 등 3종의 주화가 제조되었으며 1970년 11월에 100원 주화, 1972년 12월에 오십원 양백화가 발행되었다.1982년 6월에 통용주화로서는 최고 액면 주화로 오백원 백동화가 발행되었으며 이어서 1983년 1월 신화폐 체계정비에 의한 새얼굴의 주화 5종이 발행되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발행된 주화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거북선, 무궁화 등이 도안되어 있으며 백환화에 새겨진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은 한일합방 이전에는 서재필의 영도하에 설립된 협성회, 독립협회등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미국에 머물면서 조지 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등에서 수학, 1910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 일 합방으로 귀국, 기독청년회를 중심으로 활약 1917년 안창호 등과 협의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 대표를 파견시켰으며, 1919년 3.1운동후 본국에서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와 상하이에서 선포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 책임자인 집정관 총재와 국무총리로 추대되자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광복후 귀국하여 우익 민주진영의 최고지도자로서 독립 촉성중앙협의회총재, 민주의원 의장, 48년 제헌국회 의장에 이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백환 1959. 10. 30 오십환 1959. 10. 20 십환 1959. 10. 20

1592년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의 고안으로 건조된 세계최초의 돌격용 철갑전선(鐵甲戰船)이다. 이충무공(李忠武公)의 난중일기에 의하면 거북선에 설치한 포를 처음 쏘아 본 것이 임진년(1592) 3월 27일이며 처음으로 해전에 참가한 것은 사천(泗川) 해전이라고 한다. 거북선이 임진왜란때 돌격전선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였고 전란후에는 그 모양이 조금씩 변하여 용머리(龍頭)는 거북머리가 되고, 치수도 일반적으로 장대해지는 등 차차 크게 건조 되었는데 1795년(정조19)에 간행된 이충무공 전서에 "전라좌수영 거북선" 및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과 함께 건조에 필요한 부분적인 치수가 어느정도 기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십원 1966.8.16
동:88%  아연:12%
뒷 면
오원 1966.8.16
동:88%  아연:12%
일원 1966.8.16
동:60%  아연:40%

국보 제20호로서 다보여래의 사리를 모시어 세운 탑. 법화경에 의하면 부처님이 영취산에서 이 경을 설할 때에 다보여래의 진신사리를 모셔둔 탑이 땅밑에서 솟아나오고 그 탑속에서 소리를 내어 부처님의 설법을 찬탄하고 증명하였다고 한다. 이를 근원으로하여 세워진 탑이 다보탑이다. 이탑의 구조는 대개 옥개아래 상층을 붙인 조형을 이루고 있다. 중국에서는 732년에 무현 동남쪽에 처음 세워졌으며 우리나라에서는 756년(신라경덕왕10)김대성에 의해 세워졌다.




백원 1970.11.20
동75% 니켈25%
오십원 1972.12.1
동70% 아연18%
니켈12%
십원 1970.7.16
동65% 아연35%
오원 1970.7.16
동65% 아연35%
일원 1968.8.26
알루미늄

국제식량농업기구(F.A.O)에서 세계식량의 날을 기념하기 위한 주화 발행 권장에 따라 우리나라 주식인 쌀을 주제로 벼이삭과 잎사귀를 사실적으로 도안하였다. 벼는 우리나라 농작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중국의 기록과 김해 패총(貝塚)에서 발굴되었으며, 탄화된 쌀덩어리 및 기타 유물등으로 미루어 보아 지금부터 약 2000년전에 벼를 재배하였음이 추정된다. 그러나 1976년 경기도 여주에서 지금부터 약 3000년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탄화미가 발굴됨으로써 우리나라 벼농사의 기원이 매우 오래전임을 추정할 수 있다.


오백원 1982.6.12
동75% 니켈25%
백원 1983.1.15
동75% 니켈25%
오십원 1983.1.15
동70% 아연18%
니켈12%
십원 1983.1.15
동65% 아연35%
   
오원 1983.1.15
동65% 아연35%
일원 1983.1.15
알루미늄
   

인종1(1545년)~선조31(1598년), 시호 : 충무
1576년(선조9)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 미관 말직만을 지내다가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승진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천에서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대승하였다. 옥포, 사천, 당포, 당항포, 한산도, 부산 등지에서 대승하여 최초로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었으나 1597년 원균의 모함으로 투옥되었다가 정유재란때 원균이 참패하자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명량대첩에서 대승을 거두고 마지막 노량대첩에서 적의 유탄에 전사하였다. 투철한 조국애와 뛰어난 전략으로 민족을 왜적으로부터 구해낸 우리민족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인물의 한사람으로 문장에도 뛰어나 난중일기와 시, 시조, 한시 등 여러편의 작품을 남겼다. 초상은 정부지정 표준영정에 의하여 도안하였다.

학은 소련 한까 호반에 약 100마리, 만주 동북부 지방에 약 100마리 일본 북해도 지방에 약 270마리가 물기가 많은 초지(草地)에 서식하고 있으며 겨울철에는 남하 이동하여 중국 동남부와 우리나라에서 서식하는 겨울철새로 천연기념물 202호로 지정보호하는 국제 보호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평화와 장수의 상징으로 많은 그림이나 예술작품 등의 소재로 삼고 있으며 특히 십장생도 등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주화중 최고액면에는 비상의 나래를 편 길조(吉鳥)로 무궁한 발전을 상징하는 학이 새겨져 있다.

예로부터 근화(槿花), 시객(時客)등으로 일컬어오던 무궁화는 우리 겨레의 오랜 역사속에서 영광(榮光)과 수난을 함께 해온 민족(民族)의 꽃이다. 이 꽃은 우리 겨레의 꽃으로서만이 아니라 세계의 꽃으로 발돋움할 여러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다. 화려(華麗)한 화관(花冠), 긴 개화기(開花期), 공해에 잘 견디고 추위에 강하며 어디서나 잘자라는 이 꽃은 우리 민족성(民族性)을 그대로 빼어놓은듯한 꽃이다. 또한 수수한 수형은 아주 서민적이어서 가히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만 하다. 무궁화는 『화랑』을 위시하여 우리나라 이름이 붙여진 수많은 품종이 있으며 그 가운데 새아침을 도안화(圖案化)하여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표현하였다.


출처 : 해방자님의 플래닛입니다.
글쓴이 : 해방자 원글보기
메모 : 좋은 자료 올려주신 땅부자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