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덕환]
과학벨트, 이젠 과학을 담자
우여곡절 끝에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의 입지가 선정됐다. 대전의 신동·둔곡지구를 기초과학연구원 본원과 중이온가속기가 들어설 거점지구로 하고, 청원군 천안시 연기군에 기능지구를 두는 모양이다. 기초과학연구원 소속 연구단은 KAIST와 대덕단지 출연연구기관 연합,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울산과기대(UNIST) 포스텍 연합, 광주과학기술원(GIST) 등에 집중적으로 들어선다. 예산도 올해부터 7년 동안 당초보다 1조7000억 원 늘어난 5조2000억 원을 투입한다.
정치적 난산 끝에 입지 선정
진정한 선진국의 국격(國格)을 상징하는 기초과학의 메카를 기대했던 과학기술계의 시각에서는 불만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지난 3년 동안 세종시 논란과 지방자치단체의 치열한 유치 경쟁 속에서 표류하던 과학벨트가 이렇게라도 첫발을 내딛게 된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과학기술계의 형편이다. 어설픈 정치 참여의 위험성도 충분히 학습했다.
이제는 정치적 논란에서 확실하게 벗어나야 한다. 최종 회의도 하기 전에 일부 결과가 알려져 과학벨트위원회의 입장이 난처해졌지만, 사실 입지 선정은 처음부터 과학기술계의 일이 아니었다. 과학기술인들이 입지 선정의 달인도 아니고, 탁월한 전문성을 가진 것도 아니다. 어차피 입지는 정치적 고려에 따라 선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학기술계가 지자체의 불만을 가라앉힐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입지 선정 논란은 정부와 정치권이 책임지고 해결할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의 경제성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관점에서는 낯선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 요구가 성급하고 무리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노벨상’과 한국 이름이 붙은 ‘원소(元素)’의 발견을 내세운 설득 노력은 유치하고 부끄러운 것이다. 어렵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초과학이 ‘부자’ 나라의 전유물(專有物)이고, 인류 발전에 기여해야 하는 선진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유일한 수단임을 강조해야 한다. 선진국의 문턱에 선 우리가 더는 기초과학을 외면할 수 없다. 자칫하면 남이 이뤄놓은 달콤한 과실만 따먹고 되돌려줄 생각은 하지 않는 ‘졸부(猝富)’라는 비아냥을 면하기 어렵다.
기초과학연구원의 실체에 대한 전혀 새로운 발상이 필요하다. 과학기술계가 신뢰할 수 있는 역량과 비전을 가진 원장을 발굴해서 구체적인 청사진을 만들도록 맡겨야 한다. 더 이상의 정치적 간섭이나 고려는 치명적인 독약이다. 우리 과학기술계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애정이 없는 외국의 퇴직 과학자를 데려오거나 낯선 외국의 제도를 베끼고, 외국 과학자에게 의존하겠다는 패배주의적 생각도 버려야 한다.
발전 청사진은 과학계에 맡겨야
우리 과학기술계의 역량과 윤리 수준에 대한 확실한 신뢰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이룬 놀라운 발전은 온전하게 우리 과학기술계의 노력 덕분이었다. 지역 균형 발전에도 충분히 기여했다. 세계적 과학저널인 ‘사이언스’ 같은 최고 수준의 학술지에 이름을 올리는 분야는 과학기술뿐이다. 세계적인 업적을 내는 과정에서 수천만 원의 의혹조차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 우리 과학기술계의 엄격한 윤리 수준이다. 부정과 비리가 끊이지 않는 정치 경제 분야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그런 과학기술계를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
과학벨트의 투자 규모도 정확하게 볼 필요가 있다. 7년에 걸친 5조2000억 원의 투자는 대덕단지 출연연 한 곳의 운영 예산 수준에 불과하다. ‘단군 이래 최대 투자’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이제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 불필요한 거품을 걷어내고 모두가 진정한 선진국의 국격을 갖추기 위한 기초과학 투자에 힘을 모아야 한다. 기초과학은 초당적 협력이 특별히 중요한 분야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 과학커뮤니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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