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窓)/이런일 저런일

5·16과 5·18

namsarang 2011. 5. 23. 23:50

[황호택 칼럼]

5·16과 5·18

 

 

우리 세대는 초등학교에 진학할 무렵부터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박정희 대통령 외에 다른 대통령을 모르고 살았다. 어른들이 “군인들이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정권을 잡았어”라고 하는 말을 들은 것이 5·16에 관한 첫 기억이다. 5·16이 국민적 저항을 받지 않고 빠르게 안착할 수 있었던 데는 장면 정부의 국정혼란과 함께 무혈(無血) 쿠데타라는 점도 작용했다.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5·16과 전두환 보안사령관 작품인 5·18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거사 과정만을 놓고 보면 둘 다 집권에까지 성공한 군사반란(쿠데타)이다. 하지만 5·16과 5·18은 결정적 차이가 있다. 12·12와 5·18은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전두환 신군부는 1979년 12월 12일 밤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재가도 없이 체포하면서 총질을 했다. 5·18에 대해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고 ‘현실론’을 펴는 사람들이 있지만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잠들어 있는 영령들과 기록물을 보고 나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12·12와 5·18 세력의 정권이 끝난 뒤 양김(兩金) 중에서 김영삼 씨가 정권을 먼저 잡은 것은 역사 바로잡기를 위해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처벌한 것은 김 전 대통령의 뱃심이기에 가능했다. 5·18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DJ가 단죄에 나섰더라면 정치보복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군부도 들썩거렸을 것이다.

국민이 지도자를 선출하는 제도가 자리 잡기까지는 민주주의의 본적지인 서구에서도 수백 년이 흘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에서 군사쿠데타는 관행적인 정권교체 방식이었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빈국(貧國) 중에 쿠데타를 겪지 않고 민주주의 제도를 꾸려나간 나라는 인도가 거의 유일할 것이다.

쿠데타로 경제 발전한 유일 국가

6·25전쟁이 끝나고 군은 60만 병력으로 확대됐고 군 장교들은 한국 사회에서 교육수준이 높은 집단의 하나였다. 전쟁을 치르며 장교들은 미군의 앞선 지식과 조직 관리 원리를 습득했다. 1950년대에는 수많은 한국군 장교들이 미국의 군사학교에 파견돼 선진 문물의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젊은 청년 장교들의 핏속에는 낙후한 조국과 부패한 ‘똥별’ 군대를 개혁하려는 피가 꿈틀거렸다.

 

반면에 4·19혁명 덕에 집권한 민주당은 무능하고 신·구파로 분열돼 있었다. 1961∼65년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새뮤얼 버거 씨는 “장면 총리는 권력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권력을 어떻게 행사하는지 알지 못했다. 1961년 봄 장면의 선출을 환영했던 열광은 침울과 좌절로 변했다”는 비밀보고서를 국무부에 올렸다. 장 총리가 쿠데타 군의 총소리를 듣고 수녀원으로 도망가 숨어 있는 동안에 5·16은 연착륙했다. 미군정청 경무부장을 할 때 무장 좌익들과 과감히 싸웠던 민주당 구파의 조병옥 씨(1960년 서거)가 총리였더라면 소수파 군인들에게 그처럼 어이없게 정권을 내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관점도 있다.

5·16 세력은 수출 주도 성장, 중화학공업 육성 전략을 통해 한국인을 절대빈곤에서 해방시키고 지금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한국경제의 초석을 다졌다. 한국은행이 우리나라 국민소득 통계를 처음 집계하기 시작한 1953년 67달러이던 1인당 국민소득이 1977년 1000달러를 넘어섰다. 1977년 12월에는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1964년 11월 30일 1억 달러 수출을 기록한 지 13년 만이었다.

70년대 학번들은 대체로 박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고 대학시절을 보냈다. 3월에 개학해 늘 4월이면 최루가스 연기가 교정에 난무했고 5월이면 교문이 닫혔다. 유신을 비판하다 걸리면 학생은 대학에서, 아버지는 직장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70년대 학번들 중에도 사회에 진출한 후 경제활동을 꾸리면서 박 대통령에 대한 인식을 수정한 사람이 많다.

소득 향상이 민주화 의식 깨웠다

박 대통령의 과(過)는 1972년 10월 유신이 가장 크다고 본다. 유신 체제에서 국회 사법 언론이 제 기능을 못하고 민주주의의 후퇴라는 폐해가 커졌다. 경제성장과 교육으로 깨어난 국민의식이 더 이상 폭압적인 통치를 원하지 않음을 박 대통령도 깨닫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마사태에 이어 궁정동의 총성과 함께 절대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민주화로 순조롭게 나아가지 못하고 신군부가 튀어나왔다.

5·18 세력은 국민의 소득과 의식수준이 높아진 시기에 대량살상과 구금, 인권유린, 해직, 공포 분위기 조성을 통해 정권을 장악해 민주화를 지연시켰다. 군인들이 탱크와 총으로 헌정을 중단시킨 쿠데타를 찬양할 수는 없지만 5·16과 5·18은 구분돼야 한다. 남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쿠데타가 빈발하던 시절에 군부가 집권해 세계의 찬탄을 산 경제기적을 이룬 것은 5·16이 유일하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