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모든 생물은 예외 없이 먹어야 산다. 사람도 동물처럼 생존을 위해 식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사람의 식사(食事)는 끼니로 음식을 먹는다는 사전적 의미를 뛰어넘는다. 사람의 식사는 단순히 음식을 먹는 행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게는 부모와 자녀, 넓게는 타인과 함께하는 교류의 장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과 식사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같이 음식을 먹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식사를 함께하다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는 물론 가정교육이 어땠는지 등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곳곳 많은 나라에서 '밥상머리 교육'을 중요시한다.
사람은 어릴 적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며 언어를 익히고, 예절을 배우며, 인내심을 기른다. 또한 가족을 배려하는 사고를 통해 사회적 공존성이 강화된다고 하니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에서의 세 살 버릇이 바로 밥상머리 교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인이 돼서도 식사는 중요한 사회 활동이자 대화 창구가 된다. 식사는 예식을 갖춘 것일수록 그 안에 담긴 상징과 메시지가 중요하다. 식사는 명예, 사회적 지위, 소속, 거룩함의 상징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타인 집으로의 초청이나 숙박은 언제나 식사로의 초청을 전제로 한다. 또 성경에는 예식을 위한 식사, 결혼과 같은 축제의 식사, 이별의 식사 등 여러 종류의 특별한 식사가 등장한다.
식사는 사회적ㆍ종교적 경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유다인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을 구분하는 선을 긋는 것이 바로 식사였다. 또한 파스카와 같이 특별한 시기 식사는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고 여겼다(신명 16,1-8).
경건한 유다인 가정은 매 식사 때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을 기억했다. 식사는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이기에 모든 식사가 다 신성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세속적 식사란 없었다. 그래서 식사 시간은 즐거운 시간이었고, 즐거움과 유쾌함이 식사의 상징이었다(잠언 15,15).
하느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고,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으로 군중을 먹이셨다(루카 9,10-17). 이처럼 풍성한 식사는 하느님 나라 상징이다.
하느님의 최후 승리와 심판을 축하하는 것도 모든 나라 백성들을 위한 식사 모습으로 나타난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6).
식사는 신약의 초대교회 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식사는 예식의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예수님을 기억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이처럼 초대교회 식사 자리는 주님 식탁에 모여 한 형제ㆍ자매가 되는 자리였다. 예수님 최후 만찬을 기억하는 식사 자리는 미사 형태로 발전했다. 우리가 날마다 하는 식사에는 이처럼 많은 상징과 메시지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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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과 제자들의 식사'(14세기 프레스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