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있는 곳 어디나 계신 하느님
신학자 하센휘틀은 "현대신학의 위기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 체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 기인한다"고 말했다. 오늘날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선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2000년이라는 역사적 시간차가 존재하고 있어서다. 또 하느님은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서양을 배경으로 하는 지리적 거리감까지 더해져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할 때 삼중고를 겪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는 하느님을 체험했다,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체험의 사전적 뜻은 '몸소 경험함, 특정한 인격이 직접 경험한 심적 과정'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하느님을 체험한 뒤 「신학대전」 집필을 멈췄다. 성인은 하느님을 체험하고 나니 그동안 자신이 이야기했던 하느님은 한낱 지푸라기와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차라리 입을 닫는 것이 낫다고 고백했다.
요즘 하느님을 체험하고 종교적 성스러움을 체험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같은 현상은 종종 사적계시 논란을 불러 일으킨다.
신비가이자 영성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과 동시대를 살았던 한 수녀가 있었다. 어느 날 그 수녀는 하느님을 체험한 사실을 십자가의 성 요한에게 인정받고 싶어했고 편지를 써서 자신의 체험을 전했다. 편지를 받은 성인은 수녀의 체험이 참된 영의 체험이 아니라고 못박았다. 겸손함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 이야기에서 드러나듯 하느님을 체험했다는 이들, 특히 사적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이다.
체험은 어떤 지식을 직접 만나고 부딪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체험을 통한 지식을 직접적 지식, 1차적 지식이라고 한다. 다른 한 편으로 독서나 다른 이들의 설명 등을 통해 얻는 지식을 간접적 지식이라고 한다.
체험을 통한 지식은 직접적인 만큼 그 영향은 강하다. 체험은 사물을 인식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이 우리 안에 자리잡을 때 비로소 체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 체험은 몇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객관성이다. 체험이 객관적이라는 것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예수 부활을 예로 들겠다. 제자들이 예수 부활을 체험한 것은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난 것이지 제자들이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체험하는 자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어떤 실재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체험의 주관성이다. 체험에는 체험자의 주관적 요소가 늘 작용한다.
셋째, 실천적 성격이다. 사람들은 체험을 통해 예전에 가졌던 이론과 지식을 수정하고 체험으로 얻은 지식으로 삶을 조정해 나간다.
넷째, 체험은 역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모든 체험은 백지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환경, 학교 교육, 종교, 경제, 문화 등을 바탕에 두고 이뤄진다.
마지막으로 체험은 긍정적 성격과 부정적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다. 체험은 우리에게 고통과 실망을 가져다 줄 수도 있고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해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은 유한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내부 깊은 곳에서 영원한 것을 갈망한다. 유한하다는 한계성과 영원에 대한 갈망에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다.
우리가 믿어야 할 신앙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것은 신경(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아타나시오신경 등)이다. 신경은 "나는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하고 고백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 믿음을 드러낸다.
이 신앙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하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라칭거 추기경(현 교황 베네딕토 16세)은 이처럼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닌 것은 모두 끊어버리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이 아닌 것들, 유혹을 끊겠다는 것이다. 이 유혹은 돈에 대한 유혹, 성과 쾌락에 대한 유혹, 권력과 명예욕에 대한 유혹으로 압축된다.
사순절을 통해 예수가 가르쳐준 것은 이 유혹에서 우리를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을 숭배하는 것만이 유혹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기위해 우리는 단식하고 자선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체험은 아브라함에서 시작돼 이집트 탈출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스라엘 신앙도 체험에서 시작했다.
아브라함은 75살 나이에 아버지와 고향을 떠나는 모험을 강행한다. 성경은 이를 하느님의 부르심이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을 자신들 조상으로 여겼고 이 조상의 하느님을 두고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엘 또는 엘로힘이라 불렸다. 엘로힘은 엘의 복수형이다. 하느님은 한 분이지만 복수형으로 쓴 것은 모든 능력을 발휘하는 역동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엘로힘은 하느님의 초월성, 위대함을 드러내는 명칭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특성은 토지의 신이 아니라 인격신이라는 데 있다. 당시 사람들은 신을 믿을 때 어떤 지역에 한정돼 있는 신을 믿었다. 하지만 유목민인 이스라엘 민족은 붙박이 신을 섬길 수 없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어느 한 곳에 한정돼 있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인간을 만나주는 인격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는 종교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고 획기적인 일이다.
정리=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는 평화방송 라디오(FM 105.3㎒)에서 매 주일 오후 6시 5분에 방송되며, 평화방송TV에서는 매주 화요일 오전 8시(본방송)에 이어 수요일 새벽 4시와 저녁 9시, 금요일 오후 4시, 주일 오후 6시에 재방송된다. 인터넷 다시 보기 www.pbc.co. 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