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공의회

(8) 칼케돈 공의회(상)(451년)

namsarang 2011. 4. 3. 15:57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8) 칼케돈 공의회(상)(451년)

그리스도의 신성만 강조, 갈등의 불씨


배경


   에페소 공의회 이후 얼마 가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발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한 대수도원 원장 에우티케스가 제공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치릴로의 열렬한 추종자였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만 지나치게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고 나서는 신성이 인성을 흡수해버려 신성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는 것은 신성뿐입니다. 신성 하나만 남아있다고 해서 이 주장을 '단성설'(單性說)이라고 부릅니다. 에우티케스의 이런 주장을 편든 사람은 치릴로의 후임으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가 된 디오스코루스였습니다.


 반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플라비아누스는 에우티케스의 주장을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448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교회회의를 열어,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단일한 인격(또는 위격) 안에 영속히 있다'는 에페소 공의회 가르침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지요. 에우티케스가 이를 거부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회의는 그를 단죄하고 대수도원장직에서 쫓아냅니다.


 에우티케스는 로마 주교인 교황 레오 1세(440~461)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하소연합니다. 자신을 지지하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디오스코루스에게도 당연히 호소했겠지요. 반면에 에우티케스를 쫓아낸 플라비아누스 총대주교도 저간의 사정을 교황에게 보고합니다.


 그런데 동로마 황제는 에우티케스의 호소를 받아들여 사안을 다시 검토하기 위해 에페소에서 공의회를 소집한다고 발표합니다. 교황 레오 1세는 에페소로 가지 않고 특사 편에 '교리 서한'이라는 친서를 보냅니다. 서한에는 '강생 이후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각 본성(신성과 인성)은 흠없이 남아있으며 두 본성은 각각 고유한 특징을 지닌 채 단일한 한 인격 안에 결합돼 있다'는 설명과 함께 에우티케스를 단죄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마침내 449년 8월 8일 에페소에서 공의회가 열립니다. 에우티케스와 그를 지지하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디오스코루스와 그 측근들만 회의에 참석합니다. 사회를 맡은 디오스코루스는 교황 특사들이 교황 친서를 낭독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는 에우티케스의 주장을 정론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에우티케스를 단죄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플라비우스를 단죄하지요. 그 여파로 플라비우스는 얼마 후 선종하고 디오스코루스 측근인 아나톨리우스가 후임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에 오릅니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는 이 공의회를 인정하지만 레오 1세 교황은 로마로 돌아온 특사들에게서 자세한 소식을 듣고는 에페소 공의회를 '강도 공의회'라고 규정합니다. 교황은 나아가 로마에서 교회회의를 열어 '강도 공의회'에서 선포한 규정을 모두 단죄하고 아나톨리우스를 합법적 총대주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강도 공의회를 바로 잡기 위한 새 공의회를 이탈리아에서 개최하도록 황제에게 요청합니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는 이를 외면하지만 뜻밖에도 상황이 바뀌어 버립니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고 누이 풀케리아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의 남편 마르키아누스가 황제에 오른 것입니다. 새 황제는 전임 황제와 반대로 레오 교황에게 교황 뜻대로 새 공의회를 소집하겠다는 의향을 밝힙니다.


 그런데 이제는 레오 교황이 시큰둥해졌습니다. 디오스코루스의 측근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오른 아나톨리우스가 에우티케스를 단죄하면서 레오 교황이 서한에서 밝힌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서로마제국은 훈족의 침입으로 상황이 좋지 않아 서방 주교들은 대부분 참석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교황은 공의회 소집 반대 의사를 황제에게 거듭 표명하지요.


 하지만 마르키아누스 황제는 451년 5월 공의회 소집 통지를 모든 관구장들과 관하 주교들에게 보내 그해 9월에 니케아로 모이도록 합니다. 서방에서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 황제 명의로 통문이 돌았습니다.


 교황 레오 1세는 자신이 참석하는 대신 시칠리아 릴리배움 주교 파스카시누스와 신부 1명을 특사로 파견하면서 다른 주교 2명과 신부 1명에게는 이들을 도우라고 부탁합니다. 또 공의회 사회를 파스카시누스 주교에게 맡기도록 하라고 황제에게 요청합니다.


 많은 주교들이 니케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황제가 뜻하지 않은 사정으로 니케아에 올 수 없게 돼 공의회 개막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다리던 주교들이 나중에는 지쳐서 불평을 해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주교들에게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맞은 편 칼케돈으로 오라고 요청합니다. 주교들과 교황 사절이 칼케돈에 도착했고 마침내 공의회가 개막합니다. 451년 10월 8일이었습니다.


이창훈 기자 / changhl@pbc.co.kr

 


 ▨잠깐 : 에페소 공의회의 불씨


 '에페소 공의회' 편에서 살펴보았듯이,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는 영원으로부터 계시는 하느님 말씀, 곧 하느님이 강생 후에도 곧 사람이 되신 후에도 '하나의 본성'을 유지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여기서 '본성'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퓌시스(라틴어 : physics, 희랍어 : ψυσιs)입니다. 라틴어에서 이 단어는 삼위일체의 '위격'(영어 Person)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반면에 대다수 희랍어권 신학자들은 이 단어를 '본성'(영어 Nature)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희랍어권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를 비롯한 그 측근들에게 '말씀이신 하느님이 강생 후에도 하나의 본성을 유지한다'는 치릴로의 표현은 '사람이 되신 말씀은 신성 하나만 있을 뿐'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한 네스토리우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당연했고, 그래서 치릴로를 '아폴리나리우스주의'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아폴리나리우스주의는 예수의 인간성을 부인해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죄된 라오디케아 주교 아폴리나리우스(315? ~392?)의 이름을 딴 이설(異說)을 말하지요.


 에페소 공의회 후 433년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와 안티오키아의 요한이 이뤄낸 타협안이 '한 본성'이란 말마디와 관련, 치릴로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 하나만 지닌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내용을 덧붙이지 않도록 하라고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페소 공의회는 '한 본성'이라는 치릴로의 표현을 받아들였지만 이를 '한 위격' 또는 '인격'으로 이해했습니다. 다만 이를 명확하게 하지 않았기에 불씨를 안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