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마주 하고 있는 칼케돈은 동로마제국 속주 가운데 하나인 비티니아 주 주도(州都)였습니다. 순교 성녀 에우페미아를 기념한 에우페미아성당에서 451년 10월 8일 마침내 공의회가 개막했습니다.
참석 주교 수는 600명 또는 630명이라는 기록이 있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적었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350~360명이 참석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이전 공의회들에 비해서 많은 주교들이 참석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대다수가 동방에서 온 주교들입니다. 서방에서는 교황이 특사로 보낸 주교 3명 외에 아프리카에서 온 주교 2명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주교들은 반달족의 침입을 피해서 온 주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앞선 세계공의회들과 마찬가지로 칼케돈 공의회 역시 사실상 동방공의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칼케돈 공의회는 11월 1일까지 한 달 동안 계속됐습니다. 회의는 21차까지 열렸다는 기록도 있지만 중복되는 회의들을 합쳐서 16차까지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사회는 레오 1세 교황에게서 이미 지시를 받은 특사 파스카시누스 주교가 맡았습니다. 첫 회의에서 2년 전 강도 공의회를 연 주역 디오스코루스 주교를 단죄하는 문제가 상정됐습니다. 열띤 공방 끝에 회의는 별 소득 없이 끝나고 맙니다.
10월 10일 2차 회의가 열립니다. 황제가 보낸 사절들은 새로운 신앙고백문을 작성하는 문제를 상정했지만 다른 주교들의 반대에 부딪칩니다. 교부들은 대신 니케아 공의회 신경과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신경, 치릴로가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편지, 그리스도의 단일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온전히 결합돼 있다는 레오 1세 교황의 '교리 서한'을 차례로 읽고 승인합니다. '교리 서한'이 낭독되자 교부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것은 레오를 통해서 베드로가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믿는 것이요, 이것이 사도들의 신앙이다. 레오와 치릴로는 같은 신앙을 가르친다."
3차 회의는 10월 13일에 열렸습니다. 디오스코루스 주교 문제가 다시 상정됩니다. 교부들은 디오스코루스 주교의 주교직과 사제직을 박탈하고, 디오스코루스 주교가 주도한 449년 '강도 공의회'의 결정들을 모두 무효화합니다. 디오스코루스는 400km나 떨어진 남부 산악지방 '강그라'라는 곳으로 유배되지요. 오늘날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북동쪽으로 약 80km 떨어진 칸키리라는 곳입니다.
칼케돈 공의회에서 가장 중요한 회의는 10월 22일에 열린 제5차 회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의회 첫 회의 때부터 신앙고백문을 만들려던 황제 측의 시도가 번번히 무산됐지만 이 회의에서 마침내 신앙고백문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23명으로 이뤄진 위원회가 초안을 작성했고, 교부들은 신앙고백문이 낭독되자 환호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는 참 하느님이며 참 사람이다. 신성으로나 인성으로 모두 완전하다. 이 신성과 인성은 예수의 인격 안에서 혼합되지도 변화하지도 구분되지도 분리되지도 않는다'는 것이 신앙고백문의 핵심이었습니다.
10월 25일 제6차 회의에는 마르키아누스 황제 부부가 참석합니다. 황제는 이전 공의회들 및 레오 교황의 가르침에 따라 신앙의 정통성을 유지하고자 공의회를 개최했으며 제국의 모든 이들이 참된 가톨릭 신앙 안에서 일치하도록 하고자 이 자리에 왔다고 연설합니다. 이어 교황 특사를 비롯해서 참석한 주교 452명이 신앙고백문에 서명을 함으로써 신앙고백문이 정식으로 선포됩니다. 이것이 오늘날에 전해지는 칼케돈 공의회 신앙고백문입니다.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은 마르키아 누스 황제와 풀케리아 황후 부부를 열렬히 환호합니다. 황제 부부는 제국에 그리스도교를 용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의 어머니 헬레나 황후에 비견되면서 '정통 신앙의 횃불'이라는 칭송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공의회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회의는 그 다음날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교회 규율 및 행정 관리에 관한 교회법적 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해서 10월 31일까지 모두 28개 조항으로 된 규정을 마련합니다. 이 규정은 여성을 유괴 납치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신분에 상관 없이) 모두 중벌에 처한다는 조항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주교와 신부, 부제 등 성직자와 수도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주교와 관련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교는 관할 교구에서 모든 수도자들에 대한 권한을 지닌다. 따라서 새 수도원을 설립할 때는 반드시 주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주교는 소속 교구를 떠난 성직자를 자기 교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주교들 사이의 분쟁은 관구 주교회의를 통해서 조정해야 하며 관구회의는 1년에 2차례 개최해야 한다. △주교와 관구장 주교 간의 분쟁은 총대주교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새 주교가 선출되면 3개월 이내에 주교로 축성돼야 한다. △교회 재산은 주교 혼자 관리해서는 안 되며 재정 담당관을 둬야 한다.
이 밖에 △성직 매매는 중벌에 처한다. △주인의 허락없이 노예를 수도원에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성직자는 중대한 이유가 없이 이 도시 저 도시로 옮겨 다녀서는 안 된다. △성직자는 다른 도시의 성당에 적을 둬서는 안 된다. △성직자는 군에 입대하지 못 하며 세속 직업을 갖지 못 한다. △독서자들은 이교 여인과 혼인해서는 안 되며 자녀를 이교인과 혼인시켜도 안 된다. △여성 부제의 서품은 40살 이상에 한하며 부제품을 받은 여성은 혼인할 수 없다. △봉헌 서약을 한 동정녀나 수사는 혼인할 수 없다는 조항들도 있습니다.
이런 조항들 외에 특별히 주목할 규정은 마지막 제28조입니다. 황제와 원로원이 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새로운 로마'이기에 새 로마인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를 로마에 이어 서열 2위로 격상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에게 로마 주교에 버금가는 권위를 부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규정을 통과시킬 때에 교황 특사들은 자리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11월 1일 공의회 마지막 날이 됐습니다. 교황 특사들은 이 마지막 조항이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크게 반발했습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가 로마 주교를 으뜸으로 여긴 것은 로마가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이라기보다 무엇보다도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가 로마 주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칼케돈 공의회 교부들은 이를 외면한 채 단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이제는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에게 로마 주교에 버금 가는 권한을 부여한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회 교부들은 교황 특사들의 항의를 수용하지 않은 채 그대로 폐회했습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