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공의회 교리선언 재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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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열린 성 소피아 성당 내부. |
대부분 동방 주교 참석, 14개 항 단죄 조항 채택
유스티니아 황제 주도, 비질리오 교황은 승인만
삼위일체 등 이전 공의회 선언들 다시 분명히 해
■개최와 진행과정
553년 5월 5일 비잔틴제국이라고도 부르는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성 소피아 성당에서 마침내 공의회가 개최됩니다. 참석 주교는 168명이었지만 절대다수가 동방에서 온 주교들이었습니다. 당시 비질리오 교황은 측근 주교 10여 명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지만 공의회에는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동방 주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데다 자칫 불상사가 생길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니케아 공의회(325)를 비롯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381), 에페소(431), 칼케돈(451)에 이르기까지 동방에서 열린 공의회들에 선대 교황 중 아무도 직접 참석한 일이없었다는 것 또한 불참 이유였다고 하는데 공의회 교부들이 삼장서를 단죄할 것이 뻔한데 이에 연루되고 싶지 않아서 참석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공의회 의사봉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에우티키우스를 비롯해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등이 맡았습니다. 공의회는 8차례 회의를 통해 6월 2일까지 약 한 달 동안 계속됐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개막 연설을 통해 선임자들이 공의회를 소집한 선례를 들어 자신의 공의회 소집을 정당화하면서 네스토리우스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합니다. 또 교황의 공의회 불참을 개탄하고는 삼장서의 주인공들인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와 그의 저작들, 키루스의 테오도레투스의 저작들. 그리고 에데사의 이바스가 쓴 문제의 편지에 대해 주교들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주교들은 첫 두 회의에서는 비질리오 교황과 그의 수행 주교들이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하는 문제를 집중 논의합니다. 그게 뜻대로 되지 않자 3차 회의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개막 연설을 토대로 신앙고백문을 만들고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을 단죄한다는 내용을 덧붙입니다. 명시적 표현은 없었지만 비질리오 교황을 단죄하는 내용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교부들은 이어 몹수에스티아 주교 테오도루스의 저작을 검토한 후 70개 항에 대해 네스토리우스주의 이설이라고 단죄하고 테오도루스가 이미 오래 전에 죽었지만 그를 파문합니다. 또 키루스 주교 테오도레투스 저작들에 대해서도 이설이라고 규정하면서 이런 사람이 어떻게 칼케돈 공의회에서 방면됐는지 의문을 표시합니다. 에데사 주교 이바스가 쓴 편지와 관련해서는 이바스가 그 편지의 저자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리고 칼케돈 공의회가 이바스를 복권한 것을 인정합니다.
공의회 교부들이 보름 가까이 이런 문제들을 논의하는 사이에 비질리오 교황은 '법령 1'이라는 독자적 문건을 만들어 측근 주교 10여명의 서명을 받고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보냅니다. 테오도루스의 저작 내용 중 일부를 단죄하지만 테오도루스를 파문에 처하지는 않고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테오도레투스와 이바스를 복권한 것)을 존중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이를 거부합니다. 그뿐 아니라 교황이 삼장서 오류를 지지하고 있다며 '모든 성인의 통공' 교리에 따라 미사 중에 기억하는 명단에서 비질리오 교황의 이름을 빼 버리도록 지시합니다. 주교들 또한 황제의 결정을 지지하지요. 5월 26일 제7차 회의 때였습니다.
■결과 주교들은 6월 2일 마지막 제8차 회의를 열어 공의회 진행 사항을 정리한 문서와 14개 항으로 이뤄진 단죄 조항을 최종 결론으로 채택합니다. 공의회 진행 사항을 정리한 문서에는 교부들이 비질리오 교황의 공의회 참석을 위해 노력했다는 언급은 있지만 교황을 거의 단죄하다시피한 제7차 회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습니다.
14개 항으로 된 단죄 조항의 앞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를 시작으로 이전 공의회의 교리적 선언들을 재언명하면서 아리우스와 네스토리우스, 에우티케스에 대한 단죄를 확인합니다. 삼장서를 단죄하는 내용은 뒷부분에 나옵니다.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는 파문에 처해지고 그의 저작들도 단죄됩니다. 그러나 키루스의 테오도레투스 경우는 테오도루스와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일부 저작들이 단죄됩니다. 또 에데사의 이바스가 마리스에게 보낸 편지도 단죄됩니다. 하지만 테오도레투스와 이바스 두 사람은 테오도루스와 달리 단죄되지 않았습니다.
교부들은 공의회의 이 결정을 반대하는 성직자는 성직을 박탈하고 평신도는 파문에 처한다고 선언합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는 공의회 결정 사항을 받아들이라고 모든 주교들에게 압력을 가합니다. 그렇지만 교황 비질리오는 여전히 판단을 보류합니다. 교황 측근들은 더러는 체포되고 더러는 이집트 사막으로 유배됩니다. 교황의 부제인 펠라지오도 감옥에 갇힙니다. 결국 6개월이 지난 12월 8일 비질리오 교황은 공의회와 그 결정사항들을 인준하는 서한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에우티키우스에게 보냅니다.
교황은 554년 2월에는 '법령 2'라는 문건을 발표해 공의회의 삼장서 단죄를 재확인하면서 그러나 이것이 칼케돈 공의회의 결정과 결코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공의회를 통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이제 교황에게 자유를 줍니다. 교황은 오랜 세월의 억류 생활을 청산하고 고단한 몸으로 귀환길에 오릅니다. 하지만 시칠리아 섬에 도착했을 때 병이 났고 섬 동쪽 시라쿠사에서 선종합니다. 555년 6월 7일이었습니다.
■공의회 이후 5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동방에서는 별 문제가 없이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서방에서는 주교들이 공공연히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특히 비질리오 교황의 부제였던 펠라지오는 비질리오 교황에 대한 '반박문'과 '삼장서를 옹호하며' 같은 글을 통해 삼장서를 단죄한 공의회의 결정을 반박했습니다. 펠라지오를 비롯해 여러 주교들이 이로 인해 귀양을 갔습니다.
그런데 비질리오 교황이 선종하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이상하게도 펠라지오를 로마 주교로 뽑습니다. 서방 주교들의 반대에도 펠라지오는 비질리오 후임으로 제60대 교황에 올라 펠라지오 1세(재위 556~561)가 됩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이탈리아 북부 지역인 밀라노와 아퀼레이아 대주교들은 로마와의 단절을 선언합니다. 밀라노는 10여년 후 다시 친교를 회복하지만 아퀼레이아는 50년 이상 로마와 관계를 단절하다가 607년에 가서 관계를 다시 회복합니다.
다섯 번째 세계공의회로 기록되는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어떤 의미로는 단성설 추종자들의 환심을 사서 비잔틴 제국의 안녕을 꾀하려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개인적 야심이 빚어낸 산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주의를 거듭 단죄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인격 안에서 위격적 일치를 이룬다는 그리스도론 교리를 다시 한 번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닙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