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중국 지린성 지린시(吉林市) 룽탄구(龍潭區) 아라디촌(阿拉底村). 35도가 넘는 불볕 더위 속에서 20여명이 삽을 들고 분주히 움직였다.
2009년 중국 정부가 인민폐 2000만위안(약 32억8000만원)을 들여 지은 한옥 일곱 채에 겨울을 대비해 한창 온돌을 놓는 중이었다.
한국에서 찾아온 전문가들이 작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온돌학회 회장 김준봉(53)씨와 이한구(60), 유명성(45), 박태규(70)씨 등이 연장을 들고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꼼꼼하게 작업 방법을 알려줬다.
이들은 기술 전수를 위해 지난해부터 두 차례에 걸쳐 세 채에 시범 공사를 했고, 나머지는 마을 사람들이 전수받은 기술로 깔기로 했다. 오후가 되자 노인정에 있던 70~80대 할머니 10여명이 텃밭에서 캔 감자와 옥수수를 쪄왔다.
지린시 아라디촌은 옌볜 조선족자치주와 250㎞ 떨어져 있다. 옌볜이 함경도에서 건너온 동포들 위주로 형성된 곳이라면 아라디는 경상도에서 건너온 동포들과 후손들이 모여 산다. 경상도 사투리와 풍습, 문화가 그대로 보존된 '중국 속의 경상도'다.
1931년 만주사변 때 일본은 이곳을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 경상도 주민들을 데려왔고, 늪지와 자갈밭뿐인 이곳에 버려놓다시피 했다. 사람들은 척박한 땅과 싸우며 첫 겨울을 맞았고, 영하 30도를 밑도는 혹한 속에 절반가량이 추위와 배고픔으로 죽었다.
이 마을에서 일생을 보낸 최병열(여·80)씨는 "여덟살 때 이곳에 와서 매일 밭을 일구고 겨울엔 살이 에일 것 같은 추위에 온 가족이 부둥켜안고 잤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이젠 겨울에 정말 뜨뜻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아라디마을에서 태어난 2세와 3세들은 마을 안에 있는 초·중·고등학교에서 한글로 교육을 받았다. 식사는 각자 텃밭에서 일군 옥수수, 감자, 토마토 등을 요리해 해결했다. 해가 지면 마을도 함께 어두워졌다. 길가에 가로등이 설치돼 있지만 전기를 아끼기 위해서다.
개혁개방 이후 많은 젊은이가 일거리가 부족하고 소비 시설이 뒤떨어진 무료한 아라디마을의 생활에 지쳤다. 돈도 필요했다. 젊은이들이 한국으로, 도시로 떠나면서 마을엔 노인들만 남았다. 아라디 촌민위원회에 따르면 과거 700가구에 2800명이던 동포 숫자는 200가구 300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아라디마을 1세대에게 한국은 항상 '그립지만 돌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아라디 초등학교 교사 심정여(48)씨는 "지난해 10월 아버지와 함께 경북 안동 고향을 방문한 적이 있다"면서 "옛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한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는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고 했다.
한글로 아이들을 가르치던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문을 닫았다. 지금 남아있는 유치원과 초등학교는 교사 9명에 학생 3명이 전부다. 촌장 손씨는 "척박한 땅을 개간해 근 1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마을이 사라져가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했다.
2001년 설립돼 올해로 10년째를 맞은 온돌학회 회원들은 아라디촌이 우리의 맥을 잇기 위한 민속촌을 조성 중이라는 말을 듣고 사비를 털어 이곳까지 왔다. 김 회장은 "1994년부터 8년 동안 옌볜과기대 교수로 재직하며 영하 30도의 추위를 경험한 적이 있다. 동포들에게 한국의 온돌이 얼마나 따듯하고 우수한지 전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기사제공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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