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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史에 ‘혁신의 씨앗’을 뿌리고 떠난 Mr. 애플

namsarang 2011. 10. 7. 22:51

[스티브 잡스 사망]

 

인류史에 ‘혁신의 씨앗’을 뿌리고 떠난 Mr. 애플

 

잡스의 업적-일대기

 

자신이 세운 회사, 애플컴퓨터에서 1985년 쫓겨났던 스티브 잡스는 12년 만인 1997년 애플에 복귀했다. 그리고 새 광고 캠페인을 시작했다. 캠페인의 제목은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밥 딜런, 마틴 루서 킹과 존 레넌, 토머스 에디슨과 무함마드 알리, 마하트마 간디와 파블로 피카소 등의 얼굴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내레이션이 흐른다.

“여기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 부적응자에 불평꾼, 문제아들입니다.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사람들이죠. 사람들이 그들을 미쳤다고 할 때 우리는 그들 속의 천재성을 봅니다. 정신 나간 사람만이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마련이고, 그래야 세상이 달라지니까요.”

잡스의 삶이 그랬다. 모두 그를 미쳤다고 했고 문제아로 여겼다. 하지만 잡스와 애플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봤다. 사람들이 잡스와 애플을 미쳤다고 할 때 그들은 천재적인 제품을 만들어 세상을 바꿨다. 스티브 잡스의 56년 인생, 세상이 달라졌다.

○ 창업

잡스는 1955년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곧바로 양부모에게 입양됐다. 하지만 불행하지 않았다. 누군가 잡스에게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를 언급하면서 ‘양부모’라고 표현할 때면 잡스는 바로 ‘부모’라고 단어를 바로잡곤 했다. 좋은 가정이었다. 그리고 좋은 환경이었다. 그곳이 실리콘밸리였기 때문이다.

잡스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미 항공우주국(NASA)의 에임스 연구소가 있었다. 잡스는 어린 시절 그곳에서 비슷한 나이의 소년들이 보지 못했던 컴퓨터를 접했다. 오리건 주의 리드대에 다니다 1학기 만에 중퇴한 뒤 실리콘밸리로 돌아와 컴퓨터에 관심 있던 엔지니어들과 사귄다. 이 모임에서 만난 사람 중 한 명이 잡스보다 다섯 살 많은 스티브 워즈니악이었다. 워즈니악은 애플컴퓨터의 첫 히트작 ‘애플Ⅱ’를 만든 사람이다.
1976년 잡스는 워즈니악의 신혼집 부엌과 자신의 집 차고를 사무실 삼아 애플컴퓨터를 창업한다. 자본금은 주머니를 탈탈 털어 만든 단돈 1000달러. 잡스에겐 확신이 있었다. 워즈니악이 만드는 컴퓨터가 곧 집집마다 한 대씩 냉장고와 세탁기처럼 팔릴 것이고, 그때가 되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누구도 잡스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았다. 아니, 미쳤다고 했다. 당시 기준으로 컴퓨터란 연구소와 기업에서 진지한 업무를 위해 쓰던 값비싼 물건이지 집에 들여놓을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1977년 잡스와 워즈니악이 만든 ‘애플Ⅱ’는 날개 돋친 듯 팔리며 개인용 컴퓨터(PC) 시대를 열었다.

1984년 잡스가 만든 매킨토시는 실패의 시작이었다. 잡스와 애플의 직원들이 제록스의 팰러앨토리서치센터(PARC)가 개발한 마우스와 그래픽유저인터페이스(GUI)를 PC에 적용한 건 혁신적이었다. 이전까지의 컴퓨터는 모두 키보드로 화면에 명령어를 입력하는 방식으로 작동했지만 매킨토시는 그림을 마우스로 클릭하면 작동했다. 미래의 컴퓨터였다.

○ 실패

문제는 이 기술을 쓴 매킨토시의 값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다. 매킨토시는 오늘날 컴퓨터의 모습을 처음으로 제시했지만 시대를 너무 앞섰다. 소비자는 값비싼 매킨토시를 외면했고 잡스는 애플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확실히 옳았다. 당시 애플의 매킨토시 컴퓨터용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팔던 작은 소프트웨어 업체인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는 이 과정에서 배운 매킨토시 소프트웨어 기술을 이용해 이후 ‘윈도’ 운영체제(OS)를 만들어낸다.

애플에서 쫓겨난 잡스는 애플에 복수하기 위해 넥스트(NeXT)라는 컴퓨터 회사를 만들었다. 멋진 디자인에 뛰어난 성능, 앞서가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한 완벽한 컴퓨터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 이번에도 잡스는 시장을 못 읽었다. 넥스트는 매킨토시보다도 더 비쌌지만 목표로 하는 소비자는 대학생이었다. 팔릴 리가 없었다.

이 시기 잡스는 1986년 영화 ‘스타워즈’의 감독으로 유명한 조지 루커스로부터 컴퓨터 그래픽 회사도 하나 사들인다. 루커스가 아내와의 이혼소송에서 져서 위자료를 물어주느라 급하게 판 회사다. 이 회사는 이후 ‘픽사’로 이름을 바꿨다. ‘토이스토리’가 처음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1995년까지 무려 9년 동안 픽사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엄청난 손해를 봤다.

당시 잡스와 함께 픽사를 창업했던 에드 캣멀은 잡스의 부고를 듣고는 “스티브는 컴퓨터로 애니?事抉퓽� 만들겠다는 정신 나간 생각을 진심으로 믿었고, 우리에게 기회를 줬다”고 회고했다.

○ 복귀

1997년 잡스는 애플로 돌아온다. 애플이 부도 직전까지 몰린 상태였다. 돌아온 잡스가 벌였던 일도 무엇 하나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복귀 직후 잡스가 벌인 가장 큰 일은 경쟁사였던 MS와의 제휴였다. 잡스는 게이츠를 찾아가 MS가 자유롭게 애플의 특허를 쓸 수 있게 하는 대신 투자를 부탁했다. 1997년 잡스의 키노트에서 MS와의 제휴 사실이 발표되고 잡스 뒤의 거대한 화면에 게이츠가 등장하자 애플의 팬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하지만 이때부터는 잡스가 옳았다. 애플은 이 협력 덕분에 급한 불을 껐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2001년 발표한 MP3플레이어 ‘아이팟’도 시작부터 실패가 예상됐다. 휴대용 음악기기 시장은 수십 년 동안 소니의 독무대였고, MP3플레이어 제조업체들은 모두 해당 분야에만 집중하는 전문 업체였다. 컴퓨터를 만들던 애플이 어떻게 MP3플레이어를 팔겠느냐는 우려였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 그대로다. 아이팟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MP3플레이어가 됐다.

2007년 선보인 ‘아이폰’도 실패하리란 예상부터 나왔다. 휴대전화 제조업은 소비자가 아니라 통신사를 대상으로 물건을 파는 사업이었다. 통신사와의 네트워크도, 영업 노하우도 없는 애플이 무슨 수로 제품을 팔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폰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스마트폰이 됐다. 아이폰에 열광한 소비자들은 통신사를 압박해 아이폰을 팔도록 했고, 아이폰을 팔지 못하는 통신사는 경쟁에서 뒤처졌다. 잡스는 시장의 역학관계를 바꿔버렸다.

 

2010년 ‘아이패드’가 나왔을 때도 모두가 입을 모아 “크기만 커진 아이폰”이라며 혹평을 쏟아냈다. 하지만 덕분에 존재하지도 않던 ‘태블릿PC 시장’이란 게 생겼고, 아이패드의 인기 때문에 PC 산업이 휘청거렸다.

잡스는 애플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밴드인 ‘비틀스’에 비교하곤 했다. “비틀스는 네 명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는 밴드죠. 서로가 균형이 잡혀 있어요. 그리고 네 명의 합은 4보다 훨씬 큽니다. 기업의 위대한 점은 이것이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애플은 팀플레이죠.”

김상훈 기자 sanhkim@donga.com blog_ic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