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윷놀이
윷판이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만큼, 삼국시대에 윷놀이가 행해졌을 가능성은 다분하다. 하지만 윷놀이에 대해 확실하게 언급된 가장 오래 전의 것은 고려시대로 소급된다.
고려말의 학자인 목은 이색 (李穡, 1328〜1396)은 이웃집 늙은이인 이상서, 박중랑, 김석, 김언, 이우중, 손숙휴가 윷놀이를 하기에 옆에 앉아서 구경을 하고, ‘장단음(長湍吟)’이란 시를 지었다.
동방의 풍속이 예로부터 세시를 중히 여겨, 흰머리 할범 할멈들이 아이처럼 신이 났네. 둥글고 모난 윷판에 동그란 이십팔 개의 점, 정법과 기묘함의 변화가 무궁무진하도다. 서툼이 이기고 교묘함이 지는 게 더욱 놀라워, 강함이 약함을 삼키고도 토하니 승부를 예측할 수 없구나. 노부가 머리를 써서 부려 볼 꾀를 다 부리고, 가끔씩 다시 흘려 보다 턱이 빠지게 웃노라.
이색이 남긴 [목은집(牧隱集)]에는 연말에 아이들이 화롯가에서 저포를 하는 모습이나, 가난한 집은 저포를 하는 모습이 적적하다거나, 시구를 읊어내는 것이 저포를 하듯이 쉽다는 표현을 썼는데, 그의 글에 나타나는 저포는 ‘장단음’ 시로 볼 때 윷놀이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로서 윷놀이는 이색이 살던 시기보다 더 오래 전부터 즐긴 매우 일반적인 놀이로, 성씨를 가진 귀족들도 놀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선비들이 경계한 윷놀이
유만공(柳晩恭, 1793∼1869)의 [세시풍요(歲時風謠)]에는 윷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붉은 싸리 네 개의 윷가락 높이 던지니, 평상 앞에 후드득 흩어져 떨어지네. 질수록 더욱 대드니 어리석기 그지없고, 질책하는 고함소리에 온 집안이 떠들썩.
윷놀이는 한바탕 떠들며 연말연시에 사람들이 모여 노는 놀이다. 그런데 조선 초기에 윷놀이로 인한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조선왕조실록] 1417년 9월 2일과 11월 3일의 기록에는 윷놀이와 관련된 사건이 보인다.
“김사문은 어머니의 상중(喪中)에 있었음에도, 이속(李續)이란 자의 집에 가서 유복중이란 자와 더불어 밤에 술을 마시고, 또 유복중(柳復中)의 아내 하옥생(河玉生)과 더불어 함께 윷놀이(柶戱)를 했다. 그런데 하옥생과 그녀의 5촌 당숙인 회양부사(淮陽府使) 김사문이 윷놀이를 하면서 정분을 통해, 밤에 몰래 유복중의 방에서 나와 다른 방으로 들어가 김사문과 함께 누워 있다가 유복중에게 발각이 된 것이다.
이에 사헌부에서 두 사람을 추문하였으나, 모두 불복했다. 사헌부의 관리가 고문하기를 청하자, 태종이 말하기를 ‘김사문은 상중에 놀이를 하였고, 유복중의 처는 김사문과 윷놀이를 하여 남녀의 분별을 어지럽혔으니, 이것을 법에 비추어 죄를 주라’고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장(杖) 80대를 맞는 벌을 받게 되었다.”
실록의 사례에서 보여지듯, 조선시대의 윷놀이는 고급 관리들도 함께 즐기는 것으로, 여성이 포함된 3〜4명이 함께 윷놀이를 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상중에 놀이를 한 것과, 양반집 여성이 남자와 밤새워 놀이를 한 것은 조선사회에서는 용납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한번은 세종의 서자인 이영(李瓔, 1425~?)이 1444년 황양 등 소인의 무리들을 불러들여 윷놀이를 하고 바둑을 두며, 거문고를 타고 노래 부르며 춤추곤 하던 것이 발각되었다. 황양의 무리는 의금부로 끌려갔다가 모두 군에 입대되었고, 이영은 벼슬이 회수되는 엄벌을 받은 일도 있었다. 윷놀이는 선비들이 즐기는 놀이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1488년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쓴 [조선부(朝鮮賦)]에는 “조선에서는 집에 도박 기구를 두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동월은 바둑이나 쌍륙 따위는 민간자제들에게 익히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주석까지 달아두었다. 이익(李瀷, 168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設)] ‘사도(柶圖)’편에서 윷놀이와 같은 잡기(雜技)는 군자로서 마땅히 할 짓이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이 아이들에게 결코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자손을 위해 경계하기 때문이라고 전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