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자료

온돌의 역사

namsarang 2012. 1. 23. 18:10

온돌은 따듯하게 데운 돌이란 뜻으로, 한국 고유의 난방 방식이다. 온돌을 빼고는 우리 역사 속 주거문화를 말할 수가 없다. 온돌과 그로 인한 우리 역사의 변화를 살펴보자.

 

 

온돌이란

온돌은 방바닥에 돌을 깔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돌(구들)을 달구어 방을 데워 난방하는 구조를 뜻한다. 온돌은 장갱(長坑), 화갱(火坑), 난돌(暖堗), 연돌(烟堗), 구들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다가, 19세기 이후 온돌이란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온돌은 불을 때는 아궁이, 아궁이에서 나온 열을 전달받은 구들, 그리고 열기가 빨리 빠져 나가는 것을 막는 개자리, 연기가 통하는 연도, 그리고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으로 구성된다. 보통 뜨거운 열이 바로 전달되는 아랫목의 구들은 두껍게, 열이 늦게 전달되는 윗목의 구들은 얇은 돌을 놓기 마련이다. 방의 구들 밑으로 만든 고랑인 방고래에 불길과 연기가 잘 통하여 구들 전체에 고루 열을 전달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온돌은 꾸준히 개량되어, 최근에는 온돌 대신 온수 파이프를 묻어 바닥을 덥히는 방식으로 아파트의 난방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최초의 온돌은 쪽구들

최초의 온돌은 방안 전체를 난방하는 것이 아니라, 방의 일부분에만 구들을 놓고 난방하는 쪽구들이었다. 쪽구들을 처음 만든 사람들은 옥저인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4〜기원후 1세기 시기 연해주 남부의 크로우노프카 문화(옥저 문화)에서 이미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당시의 쪽구들은 1자 혹은 ㄱ자 형태다. 옥저인들이 쪽구들을 발명한 것은 추운 겨울을 효과적으로 보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주변의 말갈인들은 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주거지를 땅 깊이 파서 만들었다. 반면 농사를 짓고 정착생활을 한 옥저인들은 쪽구들을 만들어 땅을 깊이 파지 않고도 집을 지을 수 있었다.

 

 

동북아시아에 널리 퍼진 쪽구들

문헌상 온돌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서기 500년 초에 역도원(酈道元)이 쓴 [수경주(水經注)]에 포구수(鮑丘水)란 강물의 수원을 적은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관계사(觀鷄寺)라는 절에는 큰 법당이 있는데, 방바닥을 돌로 고이고 돌 위를 흙칠하여 갱(坑)을 만들어 불을 지펴 방을 덥히는데 이 지방이 별나게 춥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온돌은 중국의 보편적인 난방구조는 아니었다. 관계사가 있던 지금의 베이징 인근 지역은 온돌문화의 서쪽한계라고 할 수 있다. 온돌은 발전시키고, 가장 널리 사용한 나라는 고구려였다. [구당서]에는 고구려에 온돌문화가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겨울에는 모두 기다란 구들(長坑)을 만들고 그 아래에서 불을 태워 따뜻한 열기로서 난방을 한다.”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고구려 시대 건물 유적인 동대자 유적에서는 벽면을 향해 ‘ㄱ’자 형태로 된 쪽구들이 출토되었다.

중국 요령성 환인현의 오녀산성에서 발견된 고구려 초기의 온돌 유적. 군사 주둔지로 추정되는 이곳에서도 ‘ㄱ’자 형태의 쪽구들이 발견되었다.

 

 

 

고구려 초기 유적에 해당하는 환인시 오녀산성에서는 쪽구들을 설치한 주거지가 다수 발견된 바 있고, 씨름무덤(각저총) 벽화에서도 쪽구들로 난방을 한 흔적을 엿볼 수가 있다. 또한 집안시에 위치한 동대자 유적에서도 ‘ㄱ’자 형태의 쪽구들이 발견된 바 있다. 아울러 아차산의 고구려 군사유적지에서도 쪽구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쪽구들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난방문화로 알려져 있지만, 쪽구들을 사용한 흔적은 보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견된다.

 

고조선 시대의 유적인 요령성 무순시 연화보 유적을 비롯해 북한 지역에 위치한 영변 세죽리 유적, 무산 호곡동 유적, 백제 지역인 파주 주월리 유적, 서울 풍납토성, 춘천 율문리 유적, 부여 쌍북리 유적, 여수 고락산성 유적에서도 쪽구들이 발견된 바 있다. 또한 경남 사천의 늑도 유적, 진주 평거동 유적, 함양 화산리 유적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쪽구들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에서도 사용되어, 연해주 추카노프강 건너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온돌 쌍구들이 나왔으며,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 궁궐 유적에서도 온돌이 발견된 바 있다. 심지어는 바이칼 호 근처의 이볼가 성지(城地), 버러 성지 등 흉노(匈奴)인이 남긴 유적지에서도 대거 발견되기도 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한 난방시설로 쪽구들이 동북아 지역에 널리 분포했던 것이다.

 

 

쪽구들에서 온돌방으로

삼국시대에 온돌은 방안의 일부에만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실내에는 의자, 좌상 등의 가구가 있었다. 사람들은 신발을 신고 방에 들어와 의자 등에 앉아서 일을 보는 입식생활을 했다. 실내에는 휘장이 쳐 있어 외부의 바람을 막았고, 온돌로 난방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실내에 화로나 아궁이를 들여왔다.
 
[신당서]의 ‘신라전’에는 “겨울에는 집 안에 부엌을 만든다.”고 하였다. 신라시대의 집에는 부엌이 방과 별개로 떨어져 있었으나, 겨울철에는 조리를 하기 위해 피우는 불의 열기를 실내의 난방용으로 이용하기 위해 부엌이 방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 기록은 신라에서 쪽구들을 사용했다고 볼 수는 있어도, 방바닥 전체에 난방을 하는 온돌방은 아직 사용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시대로 접어들면, 쪽구들이 여러 줄의 고래가 있는 형태로 발전하며, 마침내 방 안 전체를 데우는 온돌방이 탄생했다. 고려시대의 문신 최자(崔滋:1188〜1260)가 남긴 [보한집(補閑集)]의 기록을 살펴보자.

“평안북도 구성(龜城) 지역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수행자가 추운 겨울에 방안 구들에 앉아 조금도 추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가 얼어 죽을까 염려해 그가 나가고 난 후 시동을 시켜 급히 나무를 때서 방을 데웠는데, 수행자가 돌아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돌을 주워 다가 아궁이를 메우고 회를 이겨 틈을 막아 버리고 들어가 앉아서 참선을 하였고, 처음처럼 방을 데우려고 하지 않았다.”

이 기록은 13세기경에 아궁이가 방 밖으로 나가는 완벽한 형태의 온돌방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온돌방의 확산

양주 회암사의 온돌. 본래의 회암사 절터인 회암사지 유적에서 조선 초기의 온돌 형태를 엿볼 수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가 자주 들러 머물렀던 양주 회암사 에서는 우리나라 최대의 구들시설이 발견된 바 있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 온돌방이 널리 보급된 것은 아니었다. 일부 관청이나 부잣집에서만 볼 수 있을 정도였고, 병자나 노인의 방에 주로 설치되었다. 조선 초기 임금들 또한 온돌방에서 생활한 것이 아니었다.

 

1563년 2월 4일자 [명종실록]에는 이날 왕의 침실에서 화재가 난 일을 기록하고 있다.

“왕의 침실은 침상 아래에 으레 화기(火器)를 넣어서 따스하게 한다. 그 때 반드시 먼저 네모반듯한 벽돌을 침상 아래에 벌여놓은 다음 화기를 넣어야 하는데, 내관(內官)이 4일에 벽돌을 벌여놓지 않고 이글거리는 불을 넣고는 다시 살펴보지 아니하여 불꽃이 세어져 화기를 뚫고 침상의 판자에 닿아 불이 붙었다. 밤 이경에 이르러 불꽃과 연기가 치솟았으니 겨우 끌 수 있었다.”

 

위의 사료에서 알 수 있듯 임금의 침상은 침상 아래에 숯을 담은 화로를 넣어 덥히는 형태로, 온돌이 아니었다. 임금이 온돌방에서 생활하지 않았던 만큼, 궁궐 안에도 온돌방은 거의 없었다. 경복궁의 전각들은 마루방이었다가, 차츰 온돌방으로 개조된 것이었다. 1624년 영의정 이원익이 인조(仁祖)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이 전에 듣건대, 선조(先朝)의 나인(內人)들이 모두 말하기를 ‘사대부 집 종들도 온돌에 거처하는데 나인으로서 마루방에 거처해서야 되겠는가.’ 하므로 이로부터 대궐 안에 온돌이 많아졌다 하니, 마루방으로 바꾸면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원익의 말에 따르면, 궁녀들이 생활하는 방이 온도로 변화한 것은 16세기말 선조 시대부터였던 것이다.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와 서재 또한 본래 마루방이었다. 1417년에 병자를 위해 온돌방 하나를 설치했었고, 전체가 온돌방으로 바뀐 것은 1528년이 되어서였다.

 

 

온돌의 장점과 폐해

 

보물 제 811호로 지정된 경복궁 아미산 굴뚝.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종 2년(1865) 경복궁을 고쳐 세울 때 만든 것이다. 주거시설의 일부분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아름다운 장식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창덕궁 전각에 난방을 하기 위한 아궁이. 별도의 취사를 하지 않는 아궁이인 만큼 열 효율이 크게 떨어지고, 나무 소비도 많았다.

 

 

 

온돌은 방바닥을 고루 덥혀주기 때문에 습기가 차지 않고 화재에도 비교적 안전하다. 한번 뜨거워진 구들장은 오랫동안 방바닥을 따듯하게 해주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연기와 재 등이 방에 남지 않으므로 청결한 생활이 가능하며, 특별한 가구 없이 지낼 수 있기 때문에 실내 공간 활용에도 장점이 있다. 따라서 과거의 많은 전통문화가 사라졌음에도 온돌만큼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온돌을 가장 이상적인 온방 시스템이라고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온돌이 빠르게 확산되지 못했던 것은 몇 가지 문제 때문이었다. 먼저 방안 전체에 열기가 고루 전달되도록 고래를 놓고 구들장을 만드는 것이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쉽게 전해지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방을 뜨겁게 가열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온도 조절이 어렵다는 점도 단점이 될 수 있다. 아울러 온돌방은 열효율이 30%에 불과해 열손실이 큰 난방시설인 만큼 많은 연료를 소비하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성대중(成大中:1732∼1812)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온돌이 유행하게 된 것도 김자점(1623년 인조반정의 1등 공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옛날에는 방이 모두 마루여서 큰 병풍과 두꺼운 깔개로 한기와 습기를 막고 방 한두 칸만 온돌을 설치해서 노인이나 병자를 거처하게 하였다. 인조 때 도성의 네 산에 솔잎이 너무 쌓여 여러 차례 산불이 나서 임금이 근심하자, 김자점이 이에 오부(五部)의 집들에 명해 온돌을 설치하게 하자고 청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솔잎을 처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따뜻한 걸 좋아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이 명령을 따라 얼마 안 가서 온 나라가 이를 설치하게 되었다. 지금은 이 온돌의 폐해가 심하니, 젊은 사람들이 따뜻한 데 거처하면 근육도 뼈대도 약해지며, 습지나 산이 모두 민머리가 되어 버려 장작과 숯이 날이 갈수록 부족해지는데도 해결책이 없다.”

성대중의 말처럼 온돌은 많은 연료를 소비하게 되어 산에 나무가 고갈되게 만들었다. 땔나무가 부족해져 양반들조차 추위에 떠는 경우도 생겼다. 19세기말 조선을 방문한 선교사들은 조선의 산에 나무가 없음을 신기하게 여길 정도였다.

 

 

기후 변동과 온돌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온돌이 전국적으로 급격하게 퍼진 것은 16〜17세기의 기후변화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는 전세계적으로 추위가 닥친 시대였다. 겨울의 기온이 급격하게 낮아져 화로와 휘장만으로는 추위를 감당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온돌이 널리 퍼져 보편화되었다. 이에 따라 온돌방을 만드는 기술도 함께 발전하면서, 17세기 말에는 온돌방이 주택의 중심이 되었다.

 

 

온돌방의 확산으로 인한 변화

온돌방의 확산은 주거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마루방이 감소한 것은 물론, 안방에 난방을 하기 위해 남쪽에 아궁이를 놓다보니, 안방이 어두워졌다. 아울러 아궁이를 이용해 취사를 하기 위해 부엌을 설계하다 보니 부엌이 방보다 낮아져, 주부의 생활 동선이 나빠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존에 쓰이던 의자, 침상, 휘장 등이 퇴출되었다. 대신 온돌 바닥에 앉아 생활하기 쉽도록 문갑, 탁자 등 가구의 높이가 낮아졌다. 휘장의 퇴출은 섬유의 소비를 줄여, 여성들의 베짜기 일거리를 축소시키는 결과까지 낳았다. 성대중의 말처럼 활기차게 몸을 움직이며 돌아다니기 보다는 온돌방에 앉아서 생활하느라 사람들이 게을러지기도 했다. 또한 난방을 위해 산에서 나무를 베다 보니, 가뭄과 홍수에 취약해져 농업 생산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좌식생활은 조선 후기의 모습

쪽구들에서 온돌방으로의 변화는 우리나라 주(住) 생활사에 있어서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크게 바꾸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뜨듯한 아랫목에서 좌식생활을 하던 사람들과, 그 이전 시기 입식생활을 하던 사람들의 생활상은 많이 달랐던 것이다.

 


참고문헌: 주남철, [온돌의 기원과 변천], [한국민속문화의 탐구], 국립민속박물관, 1996;류제헌, [중국역사지리], 문학과지성사, 1999;김용만,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바다출판사, 1999; 한국고문서학회 저, [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 역사비평사, 2006; 강인욱, [춤추는 발해인], 주류성, 2009; 서지은, 홍승재, [백제의 영역확장과 온돌 유적에 관하여], [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논문집], 한국건축역사학회, 2006;공복석, [경남 서부지역 삼국시대 수혈건물지의 구들 연구], [한국고고학보]66집, 2008.

 

 

 

 

        글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등의 책을 썼다.

 

발행일  201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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