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윷놀이

namsarang 2012. 1. 23. 16:24

 

한국의 수많은 놀이 중 윷놀이는 여럿이 모여 즐길 수 있는 한국 고유의 독특한 놀이(Board game)이다. 제야(除夜)와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날까지 노는 것이 일반적이며, 사회((柶戱) 또는 척사희(擲柶戱)라고도 한다.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으며 오랜 역사와 상징성도 풍부한 놀이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윷놀이의 유래

북한 평양 동명왕릉 전시관에 그려진 고구려의 윷놀이 장면. 북한 학계에서도 고구려 시대에 윷놀이가 행해진 것으로 본다.

 

 

윷놀이는 29개의 동그라미를 그린 윷판(馬田)을 펴 놓고 2명 이상의 인원이 편을 갈라 각자 4개의 윷가락을 던지며 노는 놀이다. 박달나무 등으로 만든 나무토막인 윷가락을 던져서 도, 개, 걸, 윷, 모를 구하여 한 발부터 다섯 발까지 가서, 말 네 개가 모두 첫발(입구)인 도에서 출발하여 참먹이(날밭, 출구)를 먼저 빠져 나가는 편이 이기는 놀이다.

 

척사희(擲柶戱), 사희(柶戱)로 기록된 윷놀이의 기원에 대해 이수광(李晬光, 1563〜1628)을 비롯한 조선시대 학자들은 중국의 놀이인 저포(摴蒱)와 윷놀이를 같은 것으로 보거나, 저포에서 발전한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윷놀이를 저포로 표현한 기록도 적지 않다. 하지만 저포와 윷놀이는 다르다. 저포는 360자(子)로 된 놀이판에 사람마다 여섯 말을 가지고, 검고 흰 면이 있는 5개의 나무를 던져가며 노는 놀이로 윷놀이와는 다르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우산에 위치한 우산하 3319호분 앞에 있는 석인상에 새겨진 윷판. 석인상보다 먼저 새겨진 것으로 보았을 때, 그 제작연대는 4세기 중반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윷놀이의 기원은 선사시대까지 소급해볼 수가 있다. 윷판은 경북 영일군 청하면 오줌바위를 비롯해 경북 안동시, 영양군, 경주 남산과 반월성, 고령군 일대, 충북 단양군, 진천군, 울산시, 서울 북한산 등 전국 곳곳의 자연암반과 고인돌 덮개돌, 건물지 주초석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경북 고령군의 경우 고령읍 지산리, 운수면 월산리와 대평리, 성산면 무계리, 쌍림면 신당리, 송림리 등 여러 곳에 집중 분포하기도 한다. 바위에 새겨진 윷판은 빠르면 신석기, 늦어도 청동기 시대에는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바위에 새겨진 윷판은 놀이만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의 주산인 우산(禹山)에 위치한 4세기경에 만들어진 우산하 3319호분 옆의 인물암각바위에도 윷판이 새겨져 있다. 이것의 경우 사람들이 놀기에 적합한 위치에 새겨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윷판의 상징성


윷판은 고대 중국에서 주역(周易)을 탄생시킨 그림인 하도(河圖), 낙서(洛書)와 같이 고도의 상징체계를 담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주역을 한 단계 발전시킨 정역(正易)을 만든 김일부(金一夫, 1826〜1898)는 정역의 괘상(卦象)으로 정역팔괘, 도상(圖象)으로 윷판인 사평도(柶枰圖)를 제시하기도 한다. 이것은 윷판이 하도, 낙서에 견줄만한 상징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부여의 지방조직인 사출도(四出道) 또는 고구려의 오부족(계루부, 소노(비류나)부, 연나부, 환나부, 관나부) 전통에서 윷놀이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부여에는 나라의 왕이 있고, 모두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정하여 저가(豬-돼지), 구가(狗-개), 우가(牛-소), 마가(馬-말) 등이 있다는 기록이 전한다. 윷놀이에서 도는 돼지, 개는 개, 걸은 양, 윷은 소, 모는 말을 가리킨다. 유독 양을 가리키는 양가가 부여에 없으나, 양가는 중앙에 해당되므로 왕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부여와 부여의 문화를 이은 고구려의 5부족 전통에서 윷놀이가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최근에는 신채호의 주장보다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1년 사계절 동안 사방위로 돌아가는 북두칠성의 천체 운행에서 비롯된 모형이라는 주장이 유력해지고 있다. 29개의 윷판에서 중앙인 ‘방’을 기준으로 하면 7개의 자리가 구분되는데, 이들이 북두칠성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28개점을 태양이 지나가는 황도 28수(宿)로 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북두칠성이 암각화에 더 많이 새겨진 것 등으로 볼 때 북두칠성 상징설이 더 먼저라고 생각된다.

 

우리 조상들은 밤하늘의 별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다. 고구려에서는 신령한 별(靈星)에 대한 제사를 행하고, 예(濊)에서는 새벽에 별자리를 관측하여 그 해의 풍작을 예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구려 등에서 만든 천문도(天文圖)가 중국이나 그리스의 천문도와 다른 고유한 관측의 결과라는 점에서 볼 때, 청동기시대부터 우리 겨레는 밤하늘을 지속적으로 관측하고 그에 대한 지식을 축적해왔음을 알 수 있다. 암각화에는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별자리(w형), 북극성을 의미하는 3성 등 다양한 별자리 그림이 있다. 따라서 윷판 역시 이러한 우리 겨레의 고유한 천문 우주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윷판의 모양은 부여나 고구려의 부족제도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설과,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해 북두칠성의 천체운행 형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삼국시대의 윷놀이

미륵사지 강당 주춧돌에 새겨진 백제의 윷판. 7세기 초 백제에서도 윷놀이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7세기 중엽 당나라 이연수(李延壽)가 편찬한 [북사(北史)]의 ‘백제전’에는 백제의 놀이로 투호, 저포, 롱주, 바둑 등의 오락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때의 저포가 중국인들이 놀았던 것인지, 윷놀이를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7세기 초 백제에서 만든 미륵사지의 회랑과 강당 주춧돌 2곳에 윷판이 새겨진 것으로 보았을 때, [북사]에 기록된 저포는 윷놀이로 볼 가능성이 높다. 백제 역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5부족 체제를 갖춘 부여-고구려 문의화 전통을 가진 나라다. 이들 나라에서는 윷판을 알고 이를 놀이로도 이용했다고 여겨진다.

 

759년경에 만들어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인 [만엽집(萬葉集)]에는 윷놀이로 추정되는 ‘일복삼향(一伏三向 : うつむきさい)’이라는 유희가 등장한다. 이 유희가 신라에서 들여온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려시대의 윷놀이


윷판이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만큼, 삼국시대에 윷놀이가 행해졌을 가능성은 다분하다. 하지만 윷놀이에 대해 확실하게 언급된 가장 오래 전의 것은 고려시대로 소급된다.

 

고려말의 학자인 목은 이색 (李穡, 1328〜1396)은 이웃집 늙은이인 이상서, 박중랑, 김석, 김언, 이우중, 손숙휴가 윷놀이를 하기에 옆에 앉아서 구경을 하고, ‘장단음(長湍吟)’이란 시를 지었다.

동방의 풍속이 예로부터 세시를 중히 여겨,
흰머리 할범 할멈들이 아이처럼 신이 났네.
둥글고 모난 윷판에 동그란 이십팔 개의 점,
정법과 기묘함의 변화가 무궁무진하도다.
서툼이 이기고 교묘함이 지는 게 더욱 놀라워,
강함이 약함을 삼키고도 토하니 승부를 예측할 수 없구나.
노부가 머리를 써서 부려 볼 꾀를 다 부리고,
가끔씩 다시 흘려 보다 턱이 빠지게 웃노라.

이색이 남긴 [목은집(牧隱集)]에는 연말에 아이들이 화롯가에서 저포를 하는 모습이나, 가난한 집은 저포를 하는 모습이 적적하다거나, 시구를 읊어내는 것이 저포를 하듯이 쉽다는 표현을 썼는데, 그의 글에 나타나는 저포는 ‘장단음’ 시로 볼 때 윷놀이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로서 윷놀이는 이색이 살던 시기보다 더 오래 전부터 즐긴 매우 일반적인 놀이로, 성씨를 가진 귀족들도 놀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선비들이 경계한 윷놀이


유만공(柳晩恭, 1793∼1869)의 [세시풍요(歲時風謠)]에는 윷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붉은 싸리 네 개의 윷가락 높이 던지니, 평상 앞에 후드득 흩어져 떨어지네.
질수록 더욱 대드니 어리석기 그지없고, 질책하는 고함소리에 온 집안이 떠들썩.

윷놀이는 한바탕 떠들며 연말연시에 사람들이 모여 노는 놀이다. 그런데 조선 초기에 윷놀이로 인한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조선왕조실록] 1417년 9월 2일과 11월 3일의 기록에는 윷놀이와 관련된 사건이 보인다.

“김사문은 어머니의 상중(喪中)에 있었음에도, 이속(李續)이란 자의 집에 가서 유복중이란 자와 더불어 밤에 술을 마시고, 또 유복중(柳復中)의 아내 하옥생(河玉生)과 더불어 함께 윷놀이(柶戱)를 했다. 그런데 하옥생과 그녀의 5촌 당숙인 회양부사(淮陽府使) 김사문이 윷놀이를 하면서 정분을 통해, 밤에 몰래 유복중의 방에서 나와 다른 방으로 들어가 김사문과 함께 누워 있다가 유복중에게 발각이 된 것이다.


이에 사헌부에서 두 사람을 추문하였으나, 모두 불복했다. 사헌부의 관리가 고문하기를 청하자, 태종이 말하기를 ‘김사문은 상중에 놀이를 하였고, 유복중의 처는 김사문과 윷놀이를 하여 남녀의 분별을 어지럽혔으니, 이것을 법에 비추어 죄를 주라’고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장(杖) 80대를 맞는 벌을 받게 되었다.”

실록의 사례에서 보여지듯, 조선시대의 윷놀이는 고급 관리들도 함께 즐기는 것으로, 여성이 포함된 3〜4명이 함께 윷놀이를 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상중에 놀이를 한 것과, 양반집 여성이 남자와 밤새워 놀이를 한 것은 조선사회에서는 용납되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한번은 세종의 서자인 이영(李瓔, 1425~?)이 1444년 황양 등 소인의 무리들을 불러들여 윷놀이를 하고 바둑을 두며, 거문고를 타고 노래 부르며 춤추곤 하던 것이 발각되었다. 황양의 무리는 의금부로 끌려갔다가 모두 군에 입대되었고, 이영은 벼슬이 회수되는 엄벌을 받은 일도 있었다.
 
윷놀이는 선비들이 즐기는 놀이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1488년 조선을 방문한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쓴 [조선부(朝鮮賦)]에는 “조선에서는 집에 도박 기구를 두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동월은 바둑이나 쌍륙 따위는 민간자제들에게 익히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주석까지 달아두었다. 이익(李瀷, 1681〜1763)은 [성호사설(星湖僿設)] ‘사도(柶圖)’편에서 윷놀이와 같은 잡기(雜技)는 군자로서 마땅히 할 짓이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이 아이들에게 결코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자손을 위해 경계하기 때문이라고 전하였다.

 

 

조선인의 오락 윷놀이

1819년 김매순(金邁淳)이 한양의 세시풍속을 적은 [열양세시기]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보인다.

“설날부터 보름까지 소년들은 서로 모여 윷놀이를 하는데, 보름이 지나면 윷을 거두어 감춘다. 이날 이후로 계속하면 농사에 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름을 넘겨 윷놀이를 하면 벼가 죽는다.’라는 속담도 있다.”

윷놀이가 너무 재미있어 사람들이 깊이 빠져들 것을 우려한 나머지, 농사철까지 계속하지 못하게 막는 속담이 있었던 것이다.

 

정조시대 범죄인에 대한 판례집인 [심리록(審理錄)]에는 1782년 홍주 이독돌이란 자가 사람을 죽인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박성복이란 자와 윷놀이를 하다가 싸움이 일어나 손으로 밀쳐 죽인 것이었다. 윷놀이를 하다가 승부욕이 너무 지나친 탓에 벌어진 일이다. 윷놀이는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만큼, 사람들을 놀이에 빠지게 하는 매력이 있다. 때문에 선비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윷놀이를 너무 즐기는 것을 경계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윷놀이는 많은 이들이 즐기는 놀이였다. 조선의 시인들은 섣달 그믐밤(除夜)에 등불 아래에서 윷놀이를 하는 마을 사람들의 풍경을 읊기도 하였고, 자신들도 함께 윷놀이를 즐겼다.

 

18세기말 조선의 세시풍속을 기록한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의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제야(除夜)와 원단(元旦)에 윷가락을 던져서 새해의 길흉을 점치는 풍속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점을 치는 방법은 윷을 세 번 던져 나온 것을 [주역]의 64괘(掛) 중 하나에 배정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경도잡지(京都雜誌)]는 그 점괘까지 나열하고 있을 정도니, 당시 윷점이 대단히 유행했던 듯하다. 이익(李瀷)은 세시(歲時)에 윷놀이를 하는 것은 그 해의 풍흉을 미리 징험(徵驗- 어떠한 징조를 경험함)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연말연시에 즐기는 한국의 대표 놀이


세시(歲時) 민속놀이는 농민들이 농사일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는 연말연시에 집중되어 있다. 널뛰기, 줄다리기, 연날리기, 돌싸움, 쥐불놀이 등 많은 놀이가 연말부터 시작해 정월 대보름까지 행해진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윷놀이는 우리 겨레의 우주관을 표현해주는 상징성을 가진 가장 독특한 한국의 놀이다. 많은 전통놀이가 사라져 가고 있지만, 윷놀이만큼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놀이로서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국립민속박물관, [조선대세시기Ⅱ], 2005;국립민속박물관, [조선대세시기Ⅲ], 2007;김일권, [국내성에서 발견된 고구려 윷놀이판과 그 천문우주론적 상징성], [고구려연구]15집, 고구려연구회, 2003; 최상수, [한국민속놀이의 연구], 성문각, 1985.

 

 

 

 

        글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