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 신풍본당 주임 서광석 신부 | |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신다. 또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마음이 산란하신 중에도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하고 기도하신다. 이에 하늘에서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 밀알의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그로 인해 구원될 인류를 나타내는 예언적 상징이다. 십자가의 제사는 원죄 이후 한시적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로 바뀌게 되는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이다.
우리들 목숨은 마치 작은 옹달샘에 고인 물처럼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양치기가 막대기를 들고 양떼를 우리로 몰듯이, 늙음과 죽음도 역시 사람 목숨을 몰고 간다. 허공에 숨어도, 바다 속에 숨어도, 산중 굴에 숨어도 현세에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서 죽음처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 죽음에 대한 준비는 하지 않는다"고 인간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옛날 어느 마을에서 처녀가 아기를 가졌다. 부모는 "누구의 자식이냐?"며 딸을 다그쳤다. 궁지에 몰린 딸은 "동네 윗 절 백은 스님 아이예요"하고 엉뚱한 이름을 대고 말았다.
덕망 높은 스님의 짓이라는 데 놀란 부모는 스님을 찾아갔다. 부모가 "미거한 딸을 돌보아 주시어 혈육을 잉태하게 되었습니다"하고 말하자 스님은 담담히 "아 그래요?"할 뿐이었다. 마침내 딸이 아들을 낳아 부모가 그 사실을 알려도 스님은 "아 그래요?"라고만 했다. 괴로운 딸은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 진실이 밝혀져 부모가 스님을 찾아가 사과를 하자 스님은 "아 그래요?"하고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유교적 인습 속에서 다른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지 않았을 때 우리나라 103위 성인들과 순교자들은 죽음으로 신앙을 지켰다. 지금 우리는 그들에 비해 많은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 믿음을 위해 육체적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기상황에 있지도 않다.
그러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부당한 대우나 모함 등 인욕을 치러야 할 암울한 경우는 지금도 비일비재하다. 죽는다는 것은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죽음도 포함된다. 정신적 죽음 앞에서 동요됨이 없이 백은 스님 같이 의연하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우리 옛 속담에도 고추당초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를 견디기 위해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맹인 3년 동안 자신을 죽이며 살았다고 한다. 요즘 현대인들에게 이런 속담은 그야말로 쾌쾌한 옛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인내와 겸손, 관용과 용서 같은 영신적 순교가 아니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현 삶에서 무엇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하고 어떻게 그분 예언직과 사도직, 왕직을 수행한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과 죽음으로써 온 인류를 구원하시어 우리들 하나하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마련해 주셨다. 신앙 안에서 죽는 것은 사는 것이며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다. 이 놀라운 기적은 유혈(流血)없는 미사의 형식으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인류 종말까지 재현되고 지속될 것이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가장 사랑했던 제자들에게 배신당한 예수님에 비하면 우리가 받은 수모나 비난은 아무것도 아니다. 숨진 예수님을 품에 안고 우주를 잃은 것보다 더 공허했을 성모님의 비통함을 생각하면 우리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든 영적 죽음을 견디어 봉헌함으로써 관념적 신앙인이 아닌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 신앙의 여정에서 순간순간의 죽음이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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