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주님 수난 성지 주일

namsarang 2012. 4. 1. 09:31

[생활 속의 복음]

주님 수난 성지 주일

하느님의 아들을 죽인 인간



오늘 복음에서 대사제들은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을 비롯해 모든 이들을 소집하고 의논 끝에 예수님을 결박해 빌라도에게 끌고가 넘겼다.

 그들이 시기해 예수님을 끌고 왔다는 것을 알고 있던 빌라도는 "도대체 이 사람의 잘못이 무엇이냐?"하고 물었다. 대사제들에 의해 선동된 사람들은 더 악을 써가며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외쳤다. 빌라도도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예수를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형에 처하게 했다.

 병사들은 예수님께 가시관을 씌우고 십자가를 지게 해 해골산으로 오르게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대사제들, 율법학자들도 예수님을 조롱했으며 함께 십자가에 달린 자도 예수님을 모욕했다. 오후 3시쯤 예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복음은 사랑과 이성을 저버린 인간이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력을 위해 어느 정도까지 험악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슬픈 역사적 사건이다.
 
 어느 노인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 한참 나뭇짐을 묶고 있는데 호랑이가 나타났다. 겁에 질려 떠는데 호랑이는 조심스레 다가와 입을 벌렸다. 가만히 보니 큰 가시가 박혀있었다. 가시를 뽑아주자 호랑이는 무척 고마워하며 선물로 눈썹을 뽑아주고 "이것을 붙이고 다니면 세상에서 속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노인은 기뻐하며 집으로 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반가이 맞이하는 아내가 여우로 보이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면장에게 달려가 하소연을 하는데 면장이 늑대로 보였다. 마을 사람 모두가 토끼, 곰, 오소리 등 온갖 동물로 보였다. 노인은 "내가 사람들 속에서 사는 줄 알았더니 사람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짐승 같은 사람만 있구나"하며 탄식했다.
 
 인간은 누구나 동물적 본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하느님 닮은 사랑이 결핍된다면 참으로 짐승보다 더 짐승같이 된다. 우리는 자신보다 나은 상대를 싫어하고 배척하며 아첨하는 자를 곁에 두기 좋아한다. 이런 시기는 사실 자신의 '나쁜 본성의 화살'로 인격적 자아를 공격해 죽이는 어리석은 짓이며 자신에 대한 모독이다.

 이기심과 아집 때문에 타인의 좋은 일과 명예로움에 대해 시기ㆍ질투ㆍ중상모략을 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볼 때 가장 심각한 인간 공해나 해충과 다름없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한 장본인은 선동을 받은 군중이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율법학자들과 원로들과 대사제들이었다.

 법은 공동체 구성원의 생명과 자유, 재산을 보장한다는 사회적 약속이다. 이 근본정신을 도외시하고 규정의 문자에 얽매여 아전인수 격으로 사리(私利)만을 취하는 자를 법비(法匪)라 한다. 그리고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많은 지성인의 공감을 얻었던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을 지배자가 피지배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이용할 때 그는 공비(共匪)가 될 수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도 예수님의 근본적 가르침에서 벗어나 종교를 현세적으로 이용할 때 종비(宗匪)라 하겠다.

 우리는 하찮은 일로 이웃을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하다. 타인은 항상 옳고 정의롭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불의한 짓을 거리낌 없이 한다. 우리의 말과 행위는 너그럽게 받아들여지길 원하면서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는 까다롭고 예민하게 반응한다.

 뒤바뀐 가치관, 극단적 이기주의, 물질숭배 등 여우와 늑대 같은 이런 우리의 나쁜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 이익을 위해 부정과 불의와 적당히 타협할 때 우리는 자신의 잘못에도 예수님을 모욕하는 십자가의 좌도(左盜)가 되는 것이다. 나쁜 습성을 매일 십자가에 달아 죽게 할 때 그 우도처럼 우리는 하루하루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있게 된다.

 우리를 위해 목숨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자. "못 박히신 주님을 하루에도 수없이 만져야 합니다. 그분의 영원한 사랑을 만지면서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말씀을 묵상하며 어려운 여정에서도 단순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도록 깨어 기도하고 참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