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구원의 증인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시어 나타나신 예수님이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 떨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고 말씀하시며 안심시켰다. 그리고 구운 물고기를 잡수신 후, 성경을 설명하시어 제자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하시고, 죄를 용서받기 위한 회개를 선포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이르신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증인이란 어떤 사실에 대해 옳고 그름을 알고 그것을 밝혀주는 자를 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에서 부활의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인류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으며 사는 사람을 칭한다. 즉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로서 그분 십자가의 삶을 살며, 타인을 구원으로 이끄는 창조적 신앙생활을 하는 자를 말한다. 십자가의 삶, 곧 사랑의 삶이 배제된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참 신앙이 아니다.
복음에서 마귀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마르 5,7)하고 말한다. 마귀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따르지도 않는다. 어떤 홀어머니에게 방탕한 외아들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죽음을 앞둔 어머니가 자식에게 상자를 건네며 "아들아, 내 모든 것을 너에게 주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하는 유언을 남겼다. 아들은 장례를 치르고 난 후 그것을 열어보았는데, 그 안에는 살구색 천으로 싼 숯과 못, 새순 가지가 있었다. 아들은 동네 노인에게 가서 모친의 뜻을 물었다.
어르신은 "살구 색 천은 자네 어머니의 몸뚱이고, 숯덩어리는 새카맣게 탄 가슴이며, 못들은 자네가 그분 마음에 박은 상처와 같고, 새순 가지는 자네가 새로이 태어나기를 바라는 의미일세"하고 답했다.
그 후 아들은 죽음으로 마음을 전한 어머니의 뜻을 깊이 깨달았다. 그는 개심하여 열심히 일하며 남을 돕는 사람이 됐다.
신앙의 증인이 되라고 한 예수님 말씀에 따라 제자들은 둘씩 짝지어 파견됐다. 그들은 온 삶으로 예수님을 증언했고, 많은 사람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그들 힘이 강력해서가 아니라, 두려움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 삶을 진실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선불교 스님들은 "승려가 선술집에 가면 선술집이 선방이 되고, 선술집 단골 술주정뱅이가 선방에 가면 선방이 선술집이 된다"고 말한다. 이 뜻은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그 본질 역시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무리 하찮은 행동도 우리가 있는 곳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어떤 신앙인들은 교회 전통과 성스러운 전례 분위기에 푹 빠져 "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다" 하면서, 교회에 앉아 기도하고 미사참례를 한다. 하지만 나가서는 비신자와 다름없이 행동하며 자신들이 얽매어있는 그럴듯한 확신과 편견에 만족한다. 이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한 삶이 아니다.
우리 신앙인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 안에 모시어 우리의 동물적 본성을 길들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 존재 내면의 중심에 있는 예수님 성품을 가지고 십자가 삶을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현세에서 우리 삶은 지나가야 할 다리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다리 위에서 영구히 머무를 거라는 착각을 한다. 지적, 감성적으로 안주할 곳을 마련하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누구의 것이 더 크고 좋은지를 비교한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삶은 그 다리 너머에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깨우쳐 주시려고 제자들을 증인으로 파견하셨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분 말씀을 듣고 따름으로써 구원의 증인이 돼야 한다. 가정과 사회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또 그 삶이 영적으로 목말라하는 이들에게 생명수 같은 역할을 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혼탁하고 책임감이 사라지는 현대 사회에서 흑백논리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성급한 사고를 버리고, 진정한 복음 정신으로 통찰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예수님의 올바른 증인이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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