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의 복음

부활 제2주일-지식의 대상인 하느님과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

namsarang 2012. 4. 15. 11:00


[생활 속의 복음]

부활 제2주일-지식의 대상인 하느님과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

       서광석 신부
(전주교구 신풍본당 주임)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시어 그들 가운데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인사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때 함께 있지 않았던 토마스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도 예수님 부활을 불신했다. 그는 예수님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를 만져보고서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하고 말씀하셨다.

 어떤 왕이 유다의 한 랍비에게 "너희의 신이 어디에 있는지 내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랍비가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자, 왕은 "내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나의 생을 맡길 수 있느냐?"고 했다. 

 랍비는 "전하께서 왕비에게 지니신 사랑을 넣어두는 옷 주머니를 보여주시고, 저로 하여금 그것의 무게를 달아 그 크고 작음을 알게 하소서"라고 청했다. 그러자 왕은 "그것은 바보짓이야! 아무도 사랑을 옷에 넣어서 다니지는 않네"하고 답했다.

 랍비는 기다렸다는 듯이 "태양은 주께서 온 우주에 만들어 놓으신 여러 가지 중 하나지만 우리는 그것조차 잘 볼 수 없습니다. 사랑도 그처럼 볼 수 없지만 전하께서는 한 여인을 사랑하고 전하의 온 생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렇듯이 안 봐도 믿을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지 않습니까"하고 반문했다.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봐야 믿을 수 있다는 토마스나 왕은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만을 믿으려 하는 현대 실증주의의 선구자인 듯하다.

 실증주의는 과학에 의해 얻어지는 지식의 총체만이 참된 것이라는 사조이다. 근대과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지각될 수 있는 현실을 인과의 연쇄 속에서 무한히 추급해 올라가며, 이렇게 얻어진 지식을 전체적, 일반적인 것으로 확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통계적 확률과 개연성의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인과의 고리로써 모든 것이 규정될 수 있다고 보는 실증주의와 획일주의를 가지고는 역사성과 주체성, 인격성은 설명될 수 없다. 자기의 검증방법이 옳다는 것을 또한 증명하지 못한다.

 신앙은 검증된 지식이나 논리적 차원에서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인간이 지식의 굴레에 얽매여 있는 한 결코 하느님을 그 모습 그대로 만날 수 없다. 지식은 하느님을 한정시키려 한다. 그러나 본질상 하느님은 한정될 수 없는 분이시다. 모습이 진실이 아니라 모습을 통해 그 너머의 세계를 봐야 하고, 합리화의 길을 차단해야 한다. 그래서 신앙은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성 아우구스티노는 "믿기 위해 이해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이해하기 위해 믿어라"고 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성사를 집전하며 복음을 전해도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만큼 듣고 신앙을 가지기 어렵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의 성격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가르침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분 가르침을 믿고 지키는 이는 단순히 스스로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십자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믿음은 현실의 윤택이 아니고, 현재의 진실한 삶으로서 내세에 이어지는 행복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실증주의 교육에 익숙한 현대인들 틈에서 신앙생활은 참으로 어려운 여정이기도 하다. 

 너와 나를 구별하는 마음이 없고, 생기는 것 없이 주어야만 하며, 드러나지 않게 베풀어야 한다. 더 나아가 선행을 하면서도 선행을 했다는 집착의 마음마저 지워버리는 것은 반대급부를 바라는 인간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삶을 살기 위해 죽어야 한다'는 참된 행복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 주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대부분의 신앙인은 직접 예수님을 뵌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삶에서 각자 인격적 하느님과 만나며, 그 체험을 통해 믿음을 키워간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를 예수님 제자들보다 더 행복한 존재로 만들 수 있다. 예수님을 안 보고도 강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강한 믿음은 강한 사람을 이기고, 강한 자를 더욱 더 강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