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1.09 03:00
'박헌영 아들' 원경 스님 인터뷰
- /김지호 기자
지난달 29일 경기도 평택시 무봉산 야트막한 산자락. 만기사(萬奇寺) 주지이자 조계종 원로의원인 원경 스님(74·사진)은 부친의 처형 소식을 처음 전해 들었던 열여덟 살 무렵을 떠올리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아버지가 개선장군으로 돌아오면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남부러울 것 없이 공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기대가 모두 무너진 거죠."
원경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을 창설하고 해방 후 남조선노동당을 이끌다가 1956년 북에서 김일성에게 처형당한 박헌영(1900~1956)의 아들이다. 박헌영은 1941년 일제의 검거를 피해 청주에 숨어 지내던 시절, 자기를 돌봐주던 스무 살 처녀 정순년과 사이에서 스님을 낳았다. 박헌영은 정씨에게 민들레 문양이 새겨진 가락지를 선물한 뒤, 점쟁이와 벽돌공으로 전국을 떠돌며 은신했다.
해방 후 서울 장충동에서 큰아버지와 살던 원경은 김삼룡·이주하·이현상 등 남로당 핵심 지도부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70년이 흘렀지만 그는 이들을 부를 때 '선생'이라는 경칭(敬稱)을 빼놓지 않았다. 가끔은 '아저씨'라고도 불렀다. "여섯 살 무렵 대여섯 번쯤 만나 뵈었던 아버지 모습도 안개 속의 흐릿한 영상처럼 남아 있다"고 했다.
6·25가 터지자 당시 열 살 소년이었던 원경은 빨치산 사령관이었던 이현상 '아저씨'를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3년간 '산 생활'을 했던 그는 '최연소 빨치산'으로 불렸다. "총을 잡은 적은 없고, 마을에 내려가 찌그러진 주전자에 된장을 받아 오는 정도였죠. 눈과 바람과 비를 이불 삼아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전쟁이 끝날 무렵, 이현상 사령관이 "저 아이는 저 아이만의 세상이 따로 있다"며 하산(下山) 명령을 내리는 것도 직접 들었다.
박헌영과 남로당 지도부는 북에서 '미제(美帝) 간첩' 혐의로 숙청된 이후, 남북에서 모두 잊혔다. 원경도 1972년과 1983년 수경사와 안기부에서 각각 조사받았다. 하지만 주민등록이 안 돼 있던 그는 동네 친구 이름을 빌려 해군 특수부대에 자원입대, 백령도에서 3년간 복무하기도 했다. "(당시 북에 대한) 복수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김일성이 아버지를 열 번 죽였다 하더라도 그건 역사가 심판할 문제이지, 네가 가슴에 담아둘 건 아니다." 스승처럼 따랐던 한산 스님의 말씀에 원경은 마음속에 남아 있던 한 가닥 집착을 버렸다고 했다. 지금도 만기사 입구의 천왕문(天王門)에는 "원수 갚지 말고 은혜는 갚아라" 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원경은 그때부터 아버지에 관한 기록과 사진 자료를 모았다. 1993년부터 시작된 '이정(而丁) 박헌영 전집' 출간 작업은 2004년 9권으로 완간됐다('이정'은 박헌영의 아호이자 지하 활동 당시 썼던 가명이다).
원경은 아버지를 숙청한 김일성의 아들인 김정일(1942~2011) 전 북한 국방위원장보다 한 살 위다. "혹시 '북한의 저 자리가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크게 웃었다. "법회에서 신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파요. 제대로 된 중이 되지 못하고 속물이 되면, 저승의 어르신들께도 '못난 놈'이라고 혼쭐날 거요."
원경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을 창설하고 해방 후 남조선노동당을 이끌다가 1956년 북에서 김일성에게 처형당한 박헌영(1900~1956)의 아들이다. 박헌영은 1941년 일제의 검거를 피해 청주에 숨어 지내던 시절, 자기를 돌봐주던 스무 살 처녀 정순년과 사이에서 스님을 낳았다. 박헌영은 정씨에게 민들레 문양이 새겨진 가락지를 선물한 뒤, 점쟁이와 벽돌공으로 전국을 떠돌며 은신했다.
해방 후 서울 장충동에서 큰아버지와 살던 원경은 김삼룡·이주하·이현상 등 남로당 핵심 지도부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70년이 흘렀지만 그는 이들을 부를 때 '선생'이라는 경칭(敬稱)을 빼놓지 않았다. 가끔은 '아저씨'라고도 불렀다. "여섯 살 무렵 대여섯 번쯤 만나 뵈었던 아버지 모습도 안개 속의 흐릿한 영상처럼 남아 있다"고 했다.
6·25가 터지자 당시 열 살 소년이었던 원경은 빨치산 사령관이었던 이현상 '아저씨'를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3년간 '산 생활'을 했던 그는 '최연소 빨치산'으로 불렸다. "총을 잡은 적은 없고, 마을에 내려가 찌그러진 주전자에 된장을 받아 오는 정도였죠. 눈과 바람과 비를 이불 삼아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전쟁이 끝날 무렵, 이현상 사령관이 "저 아이는 저 아이만의 세상이 따로 있다"며 하산(下山) 명령을 내리는 것도 직접 들었다.
박헌영과 남로당 지도부는 북에서 '미제(美帝) 간첩' 혐의로 숙청된 이후, 남북에서 모두 잊혔다. 원경도 1972년과 1983년 수경사와 안기부에서 각각 조사받았다. 하지만 주민등록이 안 돼 있던 그는 동네 친구 이름을 빌려 해군 특수부대에 자원입대, 백령도에서 3년간 복무하기도 했다. "(당시 북에 대한) 복수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죠."
"김일성이 아버지를 열 번 죽였다 하더라도 그건 역사가 심판할 문제이지, 네가 가슴에 담아둘 건 아니다." 스승처럼 따랐던 한산 스님의 말씀에 원경은 마음속에 남아 있던 한 가닥 집착을 버렸다고 했다. 지금도 만기사 입구의 천왕문(天王門)에는 "원수 갚지 말고 은혜는 갚아라" 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원경은 그때부터 아버지에 관한 기록과 사진 자료를 모았다. 1993년부터 시작된 '이정(而丁) 박헌영 전집' 출간 작업은 2004년 9권으로 완간됐다('이정'은 박헌영의 아호이자 지하 활동 당시 썼던 가명이다).
원경은 아버지를 숙청한 김일성의 아들인 김정일(1942~2011) 전 북한 국방위원장보다 한 살 위다. "혹시 '북한의 저 자리가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크게 웃었다. "법회에서 신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파요. 제대로 된 중이 되지 못하고 속물이 되면, 저승의 어르신들께도 '못난 놈'이라고 혼쭐날 거요."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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