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

南韓 단독 선거, 좌익의 수류탄 투척 등 방해에도 투표율 95%

namsarang 2015. 2. 6. 22:55

[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1945~2015)]

南韓 단독 선거, 좌익의 수류탄 투척 등 방해에도 투표율 95%

  • 전봉관 KAIST 인문사회학부 교수
  •  

    입력 : 2015.02.06 03:00  

    [6] 정부 수립 위한 총선거

    경찰과 우익 청년들이 무장한 채 투표소 지켜
    추천인 서명 위조 이유로 이승만 경쟁자는 낙마 당해
    北, 투표일 밤 "斷電" 위협… 좌익 "부정선거"주장했지만 무소속 당선자가 42% 넘어

    1948년 5월 10일 화창한 봄날, 한국 역사상 최초의 총선거가 실시됐다. 188선거구 1만3000여 투표소에는 선거 시작 한 시간 전부터 헌옷이나마 깨끗이 빨아 정갈하게 다려 입은 유권자들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총선거를 위해 전날부터 주류 판매가 금지되었고, 선거 당일은 상인들이 자진해서 철시(撤市)했다.

    투표함을 중심으로 긴장한 표정의 선거위원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과 도끼, 야구 방망이, 곤봉을 둘러멘 향보단(鄕保團)이 투표소 주위를 삼엄하게 경비했다. 당시 경찰력은 3만5000명. 투표소 경비를 위해 한 곳에 3명씩 보내기도 부족했다. 향보단은 부족한 경찰력을 보충하기 위해 경무부장 조병옥이 군정청 승인을 얻어 우익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준(準)경찰 기관이었다. 투표 열기는 뜨거웠다. 인천에서는 투표 시작 2시간 만에 등록 유권자의 3분의 1이 투표를 마쳤다. 전라북도에서는 5시간 만인 오후 12시에 투표율 80%를 보였다. 서울에서도 오후 3시 투표율이 85%를 넘겼다. 만삭 임신부, 80대 노인도 태어나서 처음 갖는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로 나왔다.

    
	1948년 5·10 총선거 당일, 유권자가 투표하는 모습(왼쪽). 전남 나주에서는 폭력 사태에 대비해 경찰관이 죽창을 걸어놓고 경비를 섰다.
    1948년 5·10 총선거 당일, 유권자가 투표하는 모습(왼쪽). 전남 나주에서는 폭력 사태에 대비해 경찰관이 죽창을 걸어놓고 경비를 섰다.
    소선거구제로 국회의원 200명을 뽑는 선거였지만, 이승만과 신익희 등 거물급 정치인이 출마한 12개 선거구는 단독 후보로 무투표 당선이 확정되었다. 애초 이승만이 출마한 동대문 갑 선거구에는 그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전직 군정청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이 후보로 등록했다. 추첨으로 기호 1번을 배정받은 최능진은 독립운동 경력과 친일 경찰 처벌 공약 등을 내세워 선거운동 초반 선전했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이승만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 최능진을 낙마시킬 구실을 찾았다. 결국 선거를 이틀 앞두고 선거위원회는 후보 등록 때 제출한 추천인 200명 중 27명의 서명이 위조되었다는 이유로 최능진의 후보 등록을 무효화했다.

    5·10 총선거는 국민이 직접 대표를 뽑아 정부 수립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보통·평등·비밀·직접의 4대 원칙에 입각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선거였다. 하지만 분단을 공식화하는 불행한 사건이기도 했다. 남로당을 필두로 한 좌익 세력은 '남한 단독 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선거사무소와 관공서를 습격하고, 전화선을 끊고, 철도 시설을 파괴하는 등 폭력 투쟁에 나섰다. 40여 군소 정당과 무소속 후보가 난립했지만, 입후보자의 정치적 성향은 우익 일색이었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입후보자와는 달리 유권자는 성별, 연령, 계층을 초월해 선거에 참여했다. 투표에 참여하려면 4월 16일까지 선거인명부에 등록해야 했다. 선거위원회는 등록 결과 총유권자 877만여 명 중 805만여 명이 등록해서 등록률 91.8%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총유권자 숫자가 그보다 많은 983만여 명이라고 추산하여 79.7%가 등록한 것으로 보고했다. 4월 3일부터 '단선(單選) 단정(單政) 반대, 통일 국가 수립'을 기치로 봉기한 무장 시위대와 군경 사이에 교전이 지속되고 있었던 제주도에서도 유권자 등록률은 64.9%에 이르렀다.

    
	총선거 실시에 대한 입장 정리 그래픽
    치안 당국은 선거가 '대체로 큰 사고 없이' 진행되었다고 평가했지만, 남로당의 '단선 저지 투쟁'은 선거 당일까지 이어졌다. 오후 1시에는 영등포구 선거사무소에 괴한들이 침입해 선거위원의 복부를 단도로 찔러 중상을 입히고 도주했다. 오후 4시에는 마포 공덕동 제7 선거사무소에 괴한들이 침입하여 수류탄을 투척해 부근에서 놀고 있던 아이 2명이 경상을 입었다.

    5월 9~10일 이틀 동안에 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좌익의 테러로 선거사무소 41개소, 경찰관서 15개소, 관공서 4개소가 피습됐다. 선거 시설 8개소, 기관차 1량, 철로 51곳, 도로 및 교량 8곳이 파괴됐다. 남산·북악산 등 전국 86곳에서 봉화가 올랐다. 전화선 129곳, 전신선 141곳이 절단됐다. 경찰 4명, 공무원 6명, 양민 9명이 피살되었고, 폭도 27명이 숨졌다. 이렇듯 유혈 테러로 얼룩진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등록 유권자의 95.2%가 투표권을 행사했다.

    오후 7시 투표가 끝나고 이틀 후에야 나올 선거 결과를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5월 10일 밤, 평양방송은 '남조선 전력 공급 문제'에 관한 성명을 북조선 인민위원회 김두봉 부위원장 명의로 발표했다.

    "5월 14일까지 전력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는 남조선 조선인 대표를 평양에 파견할 것을 제안하고, 불응할 시에는 남조선에 대한 전력 공급을 결정적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다."

    남한 주민의 총선 참여 열기에 북한 당국은 단전(斷電) 위협으로 화답한 셈이었다.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은 5·10 총선거가 관권을 동원한 총체적 부정선거라고 선동했다. 하지만 5월 12일 오후 윤곽이 드러난 개표 결과 당선자 198명 중 무소속 당선자가 전체의 42.5%에 이르는 85명이었다.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명, 여당 격이었던 한민당이 29명으로 두 당 당선자를 합쳐도 무소속 당선자보다 1명이 적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