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었는데… 보상 푸대접… 목소리 컸어야 했나 후회된다"
- 엄보운 기자
입력 : 2015.06.11 03:00 | 수정 : 2015.06.11 13:40
[잊혀진 '세월호 義人'… 癌 투병 중인 김홍경씨]
"가라앉은 車·장비 보상금, 내겐 생계 달린 일이었지만 유가족 먼저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끝에 몰리고 보니…
내가 구한 애들 잘 지내는지 죽기 전에 얼굴이나 봤으면"3일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만난 김홍경씨는 1년 2개월 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선원들도 버리고 떠난 세월호에서 단원고 학생들을 로프로 끌어올려 구해낸 김씨는 지금 팔조차 들어 올릴 기력이 없다고 했다. 작년 12월 위암 4기 판정을 받고 화학치료를 받느라 머리카락은 다 빠졌고, 호남형이란 소릴 듣던 얼굴은 뼈와 가죽이 붙어버렸다.
김씨는 기자를 보자 "세월호 사고 때 뭘 바라고 아이들을 구한 건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나는 의인감은 아니다"고 했지만, 생의 끝자락에 선 순간에도 한때 세상이 의인이라 불렀던 자신이 구차해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는 전남 진도 맹골수도에서 배가 갑자기 균형을 잃고 왼쪽으로 걷잡을 수 없이 기울었을 때 다행히 탈출에 유리한 오른쪽 꼭대기 층(5층)에 있었다. 하지만 왼쪽 아래층에 있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하게 된 단원고 학생 수십 명을 끌어올리기 위해 배 안에 끝까지 남았다. 아이들을 구했다는 안도감에 그걸로 만족했다. 김씨는 사고 직후 세월호를 버리고 먼저 달아난 선원들과 대비돼 언론에서 의인으로 찬사를 받았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승합차와 설비 장비를 바닷속에 잃어버렸지만, 김씨는 "단원고 학생들이 먼저이고 그 가족들이 먼저라고 생각해 정부를 믿고 기다렸다"고 했다. 작년 말 위암 4기 판정을 받아 투병생활까지 하게 돼 쪼들렸지만 "그래도 정부를 믿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김씨는 세월호 참사 후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고 했다. 더 구하지 못한 아이들이 머릿속에 떠올라서라는 것이다. "아직 아래에 남아 있는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며 구해달라고 하는데 시간이 없어 더 끌어올리지 못하던 그 순간이 영상처럼 떠올랐어요." 자연적으로 치유되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아 병원에도 다녔다고 했다.
김씨는 "정부는 처음에 '피해 본 건 무엇이든 다 보상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말뿐이었다"고 했다. 중고차 값에 블랙박스, 내비게이션 값만 더해 배상금으로 530만원만 주겠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김씨는 "'차 안에 갖가지 공구며 근로자들에게 줄 임금까지 있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따졌지만, 해양수산부는 '그걸 보상받으려면 구입 영수증과 함께 차 안에 그 물건이 있었다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제출하라'고 하더라"고 했다. 김씨는 "어떻게든 영수증을 찾아 제출해봤지만 '증거 불충분'이란 말과 함께 모두 인정받지 못했다"고 했다.
배상 금액에 동의하지 않으면 '재심을 신청하라'는 안내를 받긴 했다. 하지만 그 사이 병원비로 쌓인 빚이 1500만원이었다. 게다가 해수부는 "530만원에 합의하지 않을 경우 다른 보상금도 줄 수 없다"고 나왔다. 형편이 어려운 김씨가 인적피해보상금의 일부라도 먼저 받으려 하니, 그러려면 차량 피해 금액 등이 먼저 확정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씨는 해수부가 제시한 530만원안(案)에 "도리 없이 서명하고 말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돈도 아직 김씨 수중에 들어오진 않았다.
김씨에 따르면 세월호 사고 이후 1년 2개월간 김씨를 담당한 공무원은 7명이다. 어떨 땐 이름도 밝히지 않고 "오늘부터 제가 맡게 됐다"고 전화하고 아무 연락이 없었다고 했다. 김씨가 먼저 해수부 등에 연락해도 "잠깐만 기다리라"며 전화를 5~6번 돌리다가 "여야가 세월호 특별법을 타결짓지 않으면 정부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답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는 "금전 보상이 적다고 해서 서운해하는 건 아니다"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김씨는 세월호 참사 직후 의인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땐 건설인협회에서 주겠다는 상도 마다했다. "아이들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 때 한 일로 상을 받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 그런 그도 이젠 "세상의 끝에 내몰리니 한국에선 목소리가 커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후회가 된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못 들은 걸로 해달라"면서도 "남편이 죽기 전에 아이들을 꼭 보고 싶다고 하는데 사고 뒤 단원고나 학생가족회 등으로부터 연락 한번 받아보지 못한 건 못내 서운하다"고 했다. 대한민국은 의인을 이대로 내버려둘 것인가.- 로프로 학생 20명 끌어올린 '세월호 의인' 외로운 癌 투병엄보운 기자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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