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국내
6월 보훈의 달 노래-비목의 유래
『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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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6월이 되면 생각나는 ‘한명희’ 작사, ‘장일남’ 작곡의 “비목(碑木)” 가곡 가사이다.
“비목” 가곡에 얽힌 사연을 소개한다. "비목"은 1969년에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한명희는 군 복무시절 강원도 화천 백암산 부근에서 십자 나무만 세워져 있는 무명용사의
돌무덤의 비목을 보고, 조국을 위해 죽어간 젊은이들을 기리는 내용의 시를 지었고,
장일남이 곡을 붙인 우리 가곡이다.
평화의 댐이 건설되기 전 휴전 된지 7년이 되는 1960년에 현제의 평화의 댐에서 북쪽으로
12km 떨어진 백암산 계곡 휴전선 비무장지대에 배속 되여 군 복무중이였던
소대장 육군 소위 한명희(당시 25세)는 막사 주변의 빈터에 호박이나 야채를 심을 요량으로
조금만 삽질을 하면 여기저기서 뼈와 해골이 나왔으며 땔감을 위해서 나무에 톱질을 하면
간간히 톱날이 나무에 박힌 총알과 파편 때문에 망가지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순찰 삼아 돌아보는 계곡이며 능선에는 군데군데 망가진 화이버며 탄띠 조각이며
녹슨 철모나 무기가 뒹굴고 있었다고 말한다.
동족 상쟁의 6.25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알 수 있는 증언이다.
그 후 어느 날 한소위는 순찰중 그 격전의 능선에서 개머리판은 거의 썩어가고 총열만 생생한
카빈총 한 자루를 주워왔다. 그러고는 깨끗이 손질하여 옆에 두곤 곧잘
그 주인공에 대해서 공상을 이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전쟁 당시 M1 소총이 아닌 카빈총의 주인공이라면 물론 소대장에 계급은 소위였다.
그렇다면 영락없이 나 같은 20대 한창 나이의 초급장교가 산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왕년의 격전지에서 젊은 비애를 앓아가던 어느 날, 초가을의 따스한 석양이
산록의 붉은 단풍의 물결에 부서지고 찌르르 산새 소리가 산간의 정적을 깨는
어느 한적한 해질녘 무렵, 한소위는 잡초 우거진 양지바른 산모퉁이를 지나자
칙칙한 푸른 이끼에 덮인 돌무더기 하나를 발견한다. 오랜 세월 동안 풀 넝쿨에 휘 감겨 썩어가는
십자형 비목을 보고 그것은 결코 예사로운 돌무더기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그것은 결코 절로 쌓인 돌이 아니라 뜨거운 전우애가 감싸준 무명용사의 무덤이었음에
틀림없다. 어쩌면 그 카빈총의 주인공, 자랑스러운 육군 소위의 계급장이 번쩍이던
그 꿈 많던 젊은 장교의 무덤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고 한다.
그날 이후 바로 병사들과 함께 무덤을 손질하고 십자가 비목을 다시 새우고 비목에
철모를 얹고 명복을 빌어 주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TBC 음악부 PD로 근무하던 어느 날, 그때 방송일로 자주 만나는
작곡가 장일남으로 부터 신작 가곡을 위한 가사 몇 편을 의뢰 받았다고 한다.
바로 그때 제일 먼저 머리속을 스치고 간 영상이 다름 아닌 그 첩첩 산 골짝이에 뒹굴고 있던
녹슨 철모와 이끼 덮인 돌무덤, 무덤 머리에 꽂혀있는 십자가 비목과 그 옆을 지켜 섰던 새하얀
산 목련이 떠올랐고 이내 화약 냄새가 쓸고 간 그 깊은 계곡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을 바라보면서
이름 모를 돌무덤의 주인이 자기 또래의 젊은이가 포연에 산화한 무명용사로, 그리고 비바람
긴 세월 동안 한결 같이 그 무덤가를 지켜주고 있는 그 새하얀 산 목련을 주인공 따라 순절한
연인으로 상정하고 순찰 중에 대원들이 길에서 잡아온 수놈의 궁노루(사향노루)의 짝 잃은
암놈이 달빛이 쏟아지는 매일 밤마다 애처롭게 울면 대원들도 잡아 온 것을 후회하면서 함께
울고 온 산천이 오열한 일들 등의 생각이 떠올라서 노래 가사를 작사할 수 있었다고 하며
이 노래 말에 장일남이 작곡을 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노래는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젊은 넋을 기리는 노래로 온 국민이
애창하게 되었고 특히 6월이 되면 생각나는 우리 가곡이다.
강원도 화천군에서는 백암산이 가까운 평화의 댐에 우리나라의 대표적 가곡인 "비목"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5년에 ‘비목공원’을 조성하고 비목탑과 비목노래비를 세웠다.
그리고 이 비목공원에서 1996년부터 매년 호국 보훈의 달 6월에 6.25 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젊은 나이에 순국하신 호국용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평화의 댐에서 '비목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이 행사에 비목 작곡가인 한명희 선생이 참석한다.
작사가 한명희 선생은 1939년 생으로 올해 78세. 제대 후에 TBC PD로 근무하다가
1975년 방송국을 사직하고 몇 개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작사 활동을 하였고
19년간 교수로 재임했던 서울시립대학에서는 2004년 정년퇴임했다.
그 후 국립국악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한편, 장일남 선생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6.25 때 격전지 철원에서 전투경찰로 근무한
경험이 있어서 한명희 피디가 만든 ‘비목‘의 가사를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즉석에서 멜로디를 붙였다고 한다.
장일남 선생은 한양대학교 객원교수로 있었으며 많은 오페라를 만들어 공연을 하였으며
알츠하이머 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다가 2006년 9월에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금년 초에 한명희 비목 작사자는 1996년부터 헌충일을 전후해 개최하는
비목문화제 행사에 초창기부터 행사를 위해 함께 일했으면서도 화천군을 상대로 자신의
동의 없이 “비목”이라는 단어를 지자체 행사에 사용하고 상표등록 저작권을 침해했다며
명칭사용금지와 1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춘천지방법원에 제기하고 있다.
그동안 화천군에서는 비목 노래가 화천군 관내에서 발상한 노래이므로 비목 노래를 위하여
많은 예산을 투자하여 비목공원을 조성하고 비목노래비와 비목탑을 세우고 비목문화제를
개최하는 등 ‘비목’이라는 한명희의 대표적인 노래를 홍보하여 작곡가 한명희의 명성을
높이여 주었고 이 노래가 실린 레코드가 수 만장이 팔려서 작사자, 작곡자 모두가 인세를 많이
받은 것으로 알고 있고 작곡가 장일남은 받은 인세로 처음으로 자동차를 구입하였다는데
깊은 내용은 알 수가 없으나 이 소송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평화의 댐에서 본 백암산과 비목공원
평화의 댐 안쪽 에 있는 '비목공원'전경
비목공원 설명판
위쪽에서 본 비목공원
비목탑과 비목노래비
비목탑과 설명판
비목 노래비
비목 작사자 한명희와 작곡가 장일남
비목문화제 행사
작곡가 한명희 선생이 비목문화제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는 모습
평화의 댐 표시석
평화의 댐 전경
평화의 댐 안쪽 (댐 3단계 보수공사 이전의 모습)
평화의 댐 바깥쪽 (댐 3단계 보수공사 이전의 모습)
평화의 댐 벽면 조각품
세계 평화의 종
진열되어 있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 들의 동판 사진 코너
한승수 전국무총리상(춘천출신)
호국영령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