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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건국'이라 하지 못할 이유 없다

namsarang 2016. 8. 29. 20:54

[朝鮮칼럼 The Column] 

'1948년 건국'이라 하지 못할 이유 없다


  • 강규형 명지대 교수


입력 : 2016.08.29 06:41

강규형 명지대 교수·현대사
광복절 경축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점으로 잡은 발언에 대해 일각에서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문재인 의원 등 야당에선 "반역사적·반헌법적 주장"이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얼빠진 주장"이라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미 잘 알려졌듯이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건국 50주년을 기념했고 노무현 대통령도 재임 시 같은 맥락의 발언을 했기에 이런 공격은 자가당착이다. 그들 논리라면 두 대통령도 "반헌법적"이고 "얼빠진" 것이다. 왜 그때는 가만있다가 자신들이 정권을 잃은 후에야 이런 극렬한 반발을 하는가.

그리고 지난 22일 강만길·이만열 교수 등 국사학자들이 중심이 된 역사학계 일부가 "헌법에 명시된 임시정부의 법통성과 선열들의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민족 반역자인 친일파를 건국의 주역으로 탈바꿈하려는 '역사 세탁'"이라는 성명서를 냈다. 사드 배치 반대 등 온갖 사회 이슈를 오지랖 넓게 다 거론하는 것을 보면 이들이 정치인인지 헷갈릴 정도다. 터무니없는 논리 비약과 매도는 학자가 할 일이 아니다. 이런 주장들은 여러 번 반복된 뻔한 얘기라 식상할 정도지만, 논거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안쓰럽기도 하다. 건국 기점 논쟁은 훨씬 높은 수준에서 전개돼야 한다.

굳이 건국절이라 안 해도 되고, 건국 대신에 다른 용어를 사용해도 좋다. 하지만, 독립을 했고 나라가 세워졌다는 의미에서 건국이란 용어를 기피할 이유도 없다. 역사 교과서에는 고려건국·조선건국 등의 용어로 새 나라의 건립을 표현하고 있다. 대한민국도 고조선이나 대한제국이 아니기에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다고 얘기할 수 있다. 1919년은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대한민국이 '잉태'된 것이기에 큰 의미를 갖는다. 왕정 복고가 아닌 민주공화정을 추구하고, 독립된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자는 이상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세운 것이고, 그 정신과 법통을 이어받은 것이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필자는 여러 지면을 통해 1919년을 '정신적 건국'으로 표현했다. 이때가 진정한 나라의 수립은 아니라는 것을 잘 인식한 쪽은 바로 임정 인사들 자신이었다. 1941년 11월 임정에서 발표한 '건국강령'은 독립과 새 나라 건국의 청사진을 밝힌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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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71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야당, '1948년 한민국 건국' 두고
"얼빠진 주장"이라며 저급한 비난 
'1948년 체제' 극복해야 한다는
철지난 분단사관·민중사관 드러내 
임시정부·해방·대한민국 출범은
대립이 아니라 과정으로 해석해야

임정이 주창한 국민주권과 국가 주권의 이상이 실현된 때가 1948년이었다.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자유선거이자 보통선거였던 5·10선거에서 국민주권이 구현됐고, 같은 해 12월 12일 유엔총회가 대한민국을 승인함으로써 국가 주권이 성립됐다. 유엔 감시하의 5·10선거를 통해 왕국 혹은 제국의 신민(臣民)으로 살던 사람들이 비로소 주권을 가진 국민으로 변모했고, 선거로 구성된 제헌의회에서 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을 선출했다. 내각과 사법부가 구성되면서 1948년 8월 15일 제1공화국이란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것은 국가의 '탄생'이었다. 제헌의회와 정부가 이날을 독립기념일로 정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또한 유엔총회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승인됨으로써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 '출생신고'를 완료했다. 국가의 3대 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이 확보된 것이다. 그러니 임정 수립에서 공표된 민주공화제와 독립운동의 이상을 정신사적으로 계승하고 현실적으로 구현한 1948년 대한민국 탄생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임정을 위시한 독립운동의 의미를 오히려 고양하는 것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 38선 이북은 소련의 주도로 친소적인 단독 정부 수립이 착착 진행됐고, 1946년 2월에 사실상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가 결성됐다. 더구나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이북은 중국 공산군의 후방 기지 역할을 했기에 이미 한반도 통일은 요원한 일이 돼버렸다. 이런 국제 정세를 간파한 이승만 박사가 38선 이남이라도 자유민주주의의 보루로 만들자고 한 것이 바로 정읍 연설이었다. 여기서 이승만은 궁극적으로 자유통일을 통한 대한민국의 완성을 구상했다. 대한민국의 발전은 자유통일을 통해서 진전될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반쪽에서만 대한민국이 설립됐다 해서 그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도 원래 13개 주만 건국을 한 것이고 점점 그 외연을 넓혀갔다.

임정과 1945년의 해방,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 출범은 결코 대립하는 것이 아니고 일련의 과정으로 해석해야 한다. 1948년 건국에 대해 비이성적인 비난을 하는 배경에는 1948년 체제를 부정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철 지난 분단사관·민중사관의 그림자가 존재한다. 사실이 이럴진대 '1948년 건국'을 언급한다고 해서 무조건 반(反)헌법적이라느니 친일파라느니 음해하는 공허하고 저급한 주장들은 중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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