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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엔은 부끄러운 돈인가

namsarang 2016. 9. 15. 10:21

[선우정 칼럼] 

10억엔은 부끄러운 돈인가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입력 : 2016.09.14 07:07

선우정 논설위원
10억엔이 일본에서 왔다. 작년 12월 28일 한·일이 합의문에서 일본군위안부가 입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일본 정부 예산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돈이다. 이렇게 받은 돈을 위안부 할머니 개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어떻게 사용하는가는 앞으로 우리 몫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이 돈은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길 듯하다.

엊그제 야당 대표가 청와대 회동에서 대통령에게 "10억엔으로 역사를 지우고 우리 자존심을 팔아선 안 된다"고 했다. 다른 야당 대표는 위안부 피해자 지원 단체와 함께한 자리에서 "일본 정부의 명분 없는 10억엔은 할머니들에게 치욕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낙인 효과'라는 말이 있다. 부정적으로 지목하면 대상이 실제로 부정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10억엔이 치욕적이라면 그 돈을 받는 위안부 피해자들은 이 사회에서 어떻게 낙인 찍힐까. 지금 야당 대표는 돈이 아니라 실은 피해자들에게 폭력적으로 낙인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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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29일 주한 일본 대사관 맞은 편에 털 모자를 쓴 소녀상이 서있다. /조선일보 DB

"치욕적인 돈"라고 야당 대표가 
말했다… 폭력적인 낙인이다

아흔 살 피해자에겐 정의만큼 
화해·치유도 절실하지 않은가

20년 전 일본이 아시아여성기금을 만들어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지급할 때도 그랬다. 당시 피해자 지원 단체를 이끌던 몇몇 사람은 이 기금을 "인간의 존엄성과 명예를 다시 한번 훼손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부에 등록한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61명이 돈을 받았다. 그들은 돈을 받음으로써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과 명예를 다시 한번 훼손한 것일까. 우리 사회의 거친 비판 탓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사회에서 소외돼 조용히 숨을 거둔 위안부 피해자들이 적지 않다.

위안부 문제에서 법적 배상은 우리가 이뤄내야 할 목표라고 믿는다. 우선 피해자들이 원하고 있다. 오랜 기간 이들을 지원하고 위안부 문제를 여성 인권의 세계적 이슈로 끌어올린 지지자들도 원한다. 그들의 의지는 반드시 존중돼야 한다. 하지만 법적 배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모두를 부끄럽게 여겨선 안 된다. 20년 전 아시아여성기금도 일본 국민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수많은 사람이 모금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모금은 비슷한 시기 한국이 모금한 위안부 성금의 몇 배가 넘었다. 당시 일본 국민이 기금 측에 돈과 함께 보낸 사죄 편지를 지금도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이를 두고 "인간의 존엄성과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그 선의의 사람들은 또 어떤 상처를 입었을까.

법적 배상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이상적인 당사국 법정의 배상 판결은 유감스럽게도 불가능해졌다. 그동안 일본 법정은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 소송을 모두 기각했다. 일본의 잘못을 부정한 게 아니다. 시효 등 법률상 한계에 막혔다. 승산이 없던 미국에서의 소송은 그나마 우리 측 변호사의 태만으로 기각됐다. 그 기막힌 경위가 지난달 10일자 김덕한 뉴욕 특파원의 칼럼에 실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배상을 실현하는 길은 일본 국회가 특별법을 만드는 것뿐이다. 피해자 단체는 이를 요구한다. 하지만 전후 일본 정치 지형에서 실현 가능성은 없다. 위안부 피해자가 생존하는 동안 이 지형이 바뀔 가능성도 거의 없다.

일본이 지급한 10억엔은 어떤 성격일까. '법적 배상'과 맞바꾼 돈인가. 개인의 배상권은 누구도 무효로 만들 수 없다. 피해자 지원 단체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법정에서의 배상 노력을 이어가면 된다. '최종적·불가역적 해결' 약속은 당연히 정부만 구속할 뿐이다. 10억엔은 '소녀상' 철거의 대가일까. 그랬다면 일본 정부는 소녀상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현 시점에서 돈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야당 대표는 10억엔을 '명분 없는 돈'이라고 했다. 작년 양국의 합의문을 읽으면 누구나 금방 안다. '일본 정부의 책임 통감' '총리의 사죄와 반성'이 명분이다. 10억엔이 치욕적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이 돈을 지급하게 만든 일본 측 가해자들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다. 피해자들에겐 부끄러운 돈일 수 없다. 야당은 작년 한·일 합의를 피해자 동의 없이 이뤄졌다는 이유로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일 합의에 가하는 그들의 낙인 역시 피해자 전체의 마음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일본 정부로부터 10억엔을 받은 재단의 이름은 '화해·치유'다. 이에 대응해 피해자 지원단체가 주도하는 재단의 이름은 '정의·기억'이다. 화해·치유와 정의·기억은 모두 중요하다. 정부에 등록한 위안부 피해자 중 198명이 세상을 떠났다. 남은 40명은 평균 아흔이다. 이 중 누군가는 살아 있는 동안 화해와 치유를 원할지 모른다. 일본 정부의 책임 통감과 총리의 사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물론 그냥 돈이 절실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정의와 기억을 위해 일생을 바친 위안부 피해자들처럼 그들의 선택도 존중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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