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파리만 무성한 종교 행위에 대한 경고와 영적인 믿음없이 육적인 기적만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 예수님이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음을 전하며 2장 후반부가 끝나고 드디어 3장에서 그 가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의 대표로 ‘니고데모’가 등장 합니다.
그가 왜 예수님께 왔을까요?
그가 밤에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께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기적들을 아무도 할 수 없나이다, 하매 <요한 복음 3:2>
기적을 보고 온 것 입니다. 2장 말미에 있었던 이야기 역시 기적을 보고 쫓아온 인간들을 예수님이 믿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이에 이어져 기적을 보고 쫓아온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입니다. 게다가 본문이 얘기하는 ‘니고데모’에 대한 묘사를 잘 보면 ‘니고데모’는 세상이 얘기한 모든 힘이라고 하는 것을 갖고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최고의 조건을 갖춘 니고데모
우선 ‘니고데모’는 바리새인 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전심을 다해 율법을 연구하고 목숨을 걸고 도덕적인 깨끗한 삶을 추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일례로 하스모니안 왕조중에 아리스토블루스 1세가 죽고 그 살로메가 그 남편의 첫번째 동생 얀네우스를 감옥에서 풀어주고 결혼을 해 버렸습니다. 그때 다들 두려워서 조용히 있었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이 일어나 그것이 율법에 맞지 않음을 주장하며 항거를 했고, 그 결과 살로메에 의해 80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굴하지 않고 그 부도덕에 저항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을 아주 존경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전국적으로 6,000명 정도 있었는데, 그들의 종교 행위는 적어도 겉으로 봤을땐 완벽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를 소개하며 율법에 의로 흠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니고데모 역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니고데모’를 보고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 못간다고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는 부자이자 명문가 사람이었습니다. 요세푸스의 고대사나 요아킴-예레미아스의 책을 보면, 예수님이 오시기 100년 전부터 성전이 파괴되는 AD 70년까지 ‘니고데모’의 가문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자세히 나옵니다. 얼마나 유명한 가문이면 복수의 역사서에까지 등장을 하겠습니까? 또 성경에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때, 몰약과 침향 100근을 ‘니고데모’가 갖고 오는데 몰약과 침향은 당시에 엄청나게 비싼 물품이었습니다. 그만큼 경제력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는 관원이었습니다. 3장 1절에 치리자, 관원이라고 번역된 아르콘 (ἄρχων)이라는 단어는 원래 통치자, 왕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당시에 사람들은 이 단어를 산헤드린 공회원을 지칭할 때 썼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 지도자 71명이 모여서 입법, 사법, 행정에 권세를 휘두르던 지금으로 치면 국회의원 정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 교육을 많이 받은 학자 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선생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백성들을 정복한자 라는 뜻의 헬라어 입니다. 당시 살던 사람들 중 유대 문화와 헬라 문화를 함께 접할 수 있었던 소수의 상류층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당시 학문의 최고로 인정 받았던 헬라 교육을 철저히 시키며 히브리 이름과 헬라 이름을 함께 지어주었습니다. 마치 요즘 한글 이름과 영어 이름을 갖고 있듯이요.
뿐만 아니라 ‘니고데모’는 아주 겸손한 성품의 사람이었습니다. 늙은 바리새인이었고, 부자였고, 높은 벼슬을 하고 있던 그가 이제 갓 30을 넘긴 젊은 촌 사람에게 랍비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로 자기가 찾아온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랍비는 랍비 학교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인데, 예수님은 랍비 학교는 커녕 정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목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큰 학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선생님이라고 부를수 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겸손한지를 나타냅니다.
이쯤 되면 그가 우리가 갖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부와 명예, 집안, 학벌에 성품까지 뭐하나 빠지지 않는 완벽한 엄친아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류의 사람을 부러워 하고, 또 복을 받았다고 얘기합니다. 물론 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구요. 하지만 성경은 이런 사람을 밤에 속한자, 어둠에 속한자라고 얘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선택하신 이유
하나님은 일부러 ‘니고데모’라는 모든 것을 가진자를 발탁하고 등장시킨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니고데모’가 밤에 왔다는 것을 밝힙니다.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하며 단어 하나 하나를 메세지화해서 사용합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의 언어들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요한 복음에서 밤 혹은 어두움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떠나 있는 그런 상태,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함이나 악의 영향아래 있는 것을 밤 혹은 어두움이라고 표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해 떠났을 때, 일부러 그가 나간 때가 밤이라고 기록 하는 것 입니다.
요한 복음은 그의 글에서 빛이신 예수님과 어두움을 대조시키는 것을 자주 볼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니고데모’가 밤에 왔다고 밝히는 것은 세상이 빛으로 여기는 소망으로 여기는 세상적인 힘이 결코 빛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입니다. 성경은 표적을 봤고, 세상의 힘을 모두 소유한 ‘니고데모’의 영적 상태가 밤이라는 것을 밝힘으로 그런 것이 구원과 상관 관계나 비례관계에 있지 않으며 기여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 입니다.
많은 분들이 기적을 보고 영적인 체험을 하는것이 신앙과 관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음을 얘기하는 것 입니다. 세상적인 힘을 가진 사람이 나쁘거나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구원을 받은 사람의 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의 증거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것 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도 구원을 줄 수 없다
심지어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까지도 구원의 증거나 조건이 될 수 없음이 이 이야기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요한 복음 3:3>
나를 보내신 분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도다… <요한 복음 8:29>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럼에도 ‘니고데모’는 밤에 온 사람이며 아직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그 지식을 바탕으로한 올바른 행위까지도 구원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엄청난 사실을 얘기하고 있는 것 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그 지식을 통해 겸손하게 주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신기한 표적들도 목격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너 거듭 났니?”라고 여쭤보십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구원의 조건은 성령으로 거듭났느냐의 여부 입니다
예수님은 조건이나 행동, 환경, 미덕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 성령으로 거듭났느냐 아니냐만을 보십니다.
‘니고데모’는 굉장히 당황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이며 할례를 받았고, 종교 행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는 율법을 목숨걸고 지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여겼을 것 입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 입니다.
그가 신주처럼 붙들고 있었던 할례, 제사, 율법, 선한 행위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순간인거죠. 이게 무엇이었습니까? 물이 없던 혼인 잔치의 물항아리, 이파리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 였습니다. ‘니고데모’ 이야기가 이를 강해해 주고 있는 것 입니다.
하나의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것이며 성경 전체의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 인 것 입니다.
거듭남은 자신의 노력이나 애씀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셔야 가능한 것 입니다. 그래서 위로 부터 다시 태어나다! 라는 의미의 겐네데 아노뗀 (γεννηθῇ ἄνωθεν)이 수동태로 쓰인 것 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여기에 아노뗀 (ἄνωθεν)은 두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번째는 “다시”라는 의미 입니다. 두번째는 “위로 부터”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이 아노뗀 이라는 단어 안에 구원의 기원(하늘로 부터)과 본질(다시 태어나는 것)이 다 들어 있는 것 입니다.
거듭남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창조 되는 것 입니다.
헬라어에 다시라는 단어가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위에 쓰인 아노뗀이고 다른 하나는 파린 입니다. 그런데 두 단어는 각기 쓰이는 용법이 다릅니다.
파린은 단순한 반복을 가리키는 것이고 아노뗀은 같은 원천과 반복을 가진 반복을 얘기하는 것 입니다. 예를들어 어떤 피아니스트가 소나타를 쳐서 커다란 박수를 받고 청중들이 “다시 연주해 주세요!” 라고 앵콜을 요청했을때, 만약 청중들이 파린이라는 단어로 다시 연주해 달라고 했다면, 그는 아무 곡이나 쳐도 됩니다. 콘체르토를 쳐도 되고 재즈를 쳐도 됩니다. 하지만 청중들이 다시 쳐달라는 요청으로 아노뗀이라고 했다면 그는 방금 연주한 소나타를 다시 쳐야 하는 것 입니다.
즉 거듭남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게된 동일한 형식과 원천과 방법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 입니다.
지으신 그대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우리가 처음에 어떻게 생겼나요?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이 되니라. <창세기 2:7>
하나님이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 인간이 탄생했습니다. 여기에 생기 혹은 생명의 숨은 성령을 이야기 하는 것 입니다. 흙이 자신을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해서 사람이 된게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 마음대로 흙을 사람으로 만드신 것 입니다. 어떻게 만들었냐면, 그 흙에 생기 즉 성령을 불어 넣어 사람으로 만드셨으며 거듭 날 때도 동일하게 창조되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우리는 멍하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성령이 찾아와서 우리를 뒤집고 우리를 새것으로 만들어 놓는 것 입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주님께서 거듭남의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창세기와 똑같이 물과 성령 입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었을 것 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자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냐고 질문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니고데모’가 거듭남이 무엇인지 몰랐다고 단정짓지만 사실 당시에는 거듭남에 대한 개념이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 이방인들이 유대교를 믿기 위해서는 먼저 유대인이 되는 의식을 치뤄야 했습니다. 그 때 그들은 기도, 희생 제사 그리고 세례를 통해서 개종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때 유대인들은 개종한 이방인을 가리켜 거듭난 자, 새로 출생한 자라고 불렀고 그에게 새로 태어났다고 해서 갓난 아이들이 먹는 우유를 맥이기도 했습니다.
또 헬라의 밀교에서도 밀교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가입을 위한 의식을 행하고, 그 의식 후에 그들을 출생한 자, 거듭난 자 라고 부르며 갓난아이에게 먹이는 우유를 먹였습니다.
즉 당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거듭남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왜 어떻게 사람이 다시 태어나냐고 물어봤을까요? ‘니고데모’는 그런 가짜 거듭남을 무수히 많이 보아 왔던 사람 입니다. 새로 태어났다는 사람들의 삶이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기에 ‘니고데모’는 이게 거듭남이 아닌것 같다고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가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거듭났다는 개념과 실제로 거듭났다고 한 사람들의 모습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이건 아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아노뗀이 아니자나!” 라고 생각했을수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의문은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느냐 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거듭난다는 것은 모태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 보다 더 힘든 일인것 같은데,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라고 어떻게에 강세를 두어 질문하는 것 입니다. 거듭나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담아서 주님께 그 방법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 이지요. 그래서 결국 ‘니고데모’는 나중에 거듭나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이 이에 대해 답하신 그 방법은 물과 성령 (ὕδατος καὶ Πνεύματος,)입니다. 이는 히브리 문학의 반복 기법 입니다. 히브리 문학은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를 반복해서 그 의미를 강조하는 기법이 있는데, 카이(καὶ)라는 접속사는 그리고 라는 1차적인 의미가 있지만 동격의 접속사로써도 쓰입니다. 그래서 카이(καὶ)를 가운데 두고 물과 성령이 서로를 강조하고 있는 것 입니다.
물 즉 성령 이라고 번역하는게 더 가까운 번역일 것 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거듭남의 방법으로 제시하신 물 즉 성령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마지막 날 곧 명절의 그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 기록이 말한 것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이것은 그분께서 자기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더라 <요한 복음 7:37~39>
요한은 이 곳에서 친절하게 물이 성령임을 설명해 줍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곧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의미 입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물과 성령이라고 반복 했을까요? 이는 단순히 언어의 반복으로 강조를 하기 위해서만의 의도는 아닐것 같습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재창조 입니다
밤, 흑암, 물, 수면, 성령, 하나님의 신…
생각나는 것이 없으십니까?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 입니다. 즉 거듭남의 이야기는 바로 창세기의 창조의 이야기에서 힌트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 입니다. 성경에서 물은 심판과 생명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습니다.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을 세례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주의 물이 퍼부어져서 죄가 죽고 의인이 살아나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게 세례 입니다. 침례때 사람을 물이 푹 담구는 것은 옛사람이 물에 들어가서 푹 잠겨서 죽고, 새 사람이 살아서 올라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물을 가리켜 침례라고 정의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물이 바로 심판과 생명을 동시에 갖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베드로 전서 3:21>
당시 사람들은 세례를 하고 물로 씻을때 육체의 더러운 것을 닦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물을 육체의 더러운 것을 닦는 수준이 아니라 너희에게 선한 양심을 창조해 주는 거라고 베드로 사도가 설명해 주는 것 입니다. 그래서 그 물을 침례라고 부르는 것 입니다.
또 사도 바울도 이스라엘이 홍해를 가른 사건을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은 사건이라고 정의 합니다. 죄인을 상징하는 애굽 사람은 전부 빠져 죽고, 의인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에서 살아 올라오는 것 입니다. 그래서 물은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상징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서 일어날 구속의 사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입니다. 실제로 물에 빠뜨려서 죽이고 다시 물에서 건져올리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요.
그래서 성경은 죄인은 하나님의 선물인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아무리 선한 행위를 열심히 하고 아무리 열심을 부려서 종교 행위를 한다고 해도, 절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통해서 주지시키고 있는 것 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계속 되는 종교와 은혜의 비교
그러니까 우리가 배웠던 가나의 혼인 잔치나 성전 파괴 사건이 ‘니고데모’ 이야기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 입니다. 구원은 율법과 제사로 대표되는 잎사귀만 무성한 유대교의 형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어린 양의 보혈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이라는 얘기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래야 사람이 바뀔수 있으니까요. 가짜 믿음은 사람이 안바뀌는 것 입니다. 겉으로 쇼는 하고 척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속사람이 바뀌지 않는 것 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6절에서 육은 자연적 생명이고 영은 영적 생명을 의미하는데, 이는 자연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뚜렷하게 구별됨을 ‘니고데모’에게 설명하는 것 입니다.
8절에서 거듭난다는 것은 바람이 부는 것처럼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는 모르지만 바람이 지나가면 흔적이 남듯이 거듭난 자리에 거듭남의 흔적이 남는것을 말씀하시는 것 입니다.
이땅에서 나타나는 거듭남의 효력과 열매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니고데모’가 못알아듣자, 11절에서 우리는 그것을 보고 알 수 있는데, 왜 모르냐고 책망하시며, 내가 바람의 이 땅의 것을 비유로 거듭남의 열매를 설명해도 못알아듣는 너희가 거듭남이란 것이 어디서부터 기원된 것이며 언제부터 계획 된 것이며, 언제 계획된 것이며 어떠한 능력으로 주어지게 되는지 등의 하늘의 것을 설명해 준들 너희가 알아 듣겠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 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것들을 너희에게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내가 하늘의 것들을 너희에게 말하면 어떻게 너희가 믿겠느냐? <요한복음 3:11~12>
하늘의 어전 회의에 참석한 분은 주님 밖에 없으시니까 하늘의 것에 대해서는 예수님 밖에 아시는 분이 없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비밀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에게만 계시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못했던 ‘니고데모’는 못알아 듣는 것 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3절이 이렇게 마무리 되는 것 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가지 아니하였느니라. <요한 복음 3:13>
여기서 하늘에 올라간 자라고 번역이 된 아나베베켄 에스 톤 우라논(ἀναβέβηκεν εἰς τὸν οὐρανὸν)은 직역을 하면 하늘에 계신 자 혹은 그 시제가 완료형이기 때문에 하늘에 계셨던 자 라는 의미 입니다. 13절를 풀어서 설명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있었던 자가 없다! 라는 의미 입니다.
하늘에는 나만 있었으니까 그 하늘의 것은 나 밖에 모르는데, 나 밖에 모르는 하늘의 것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에게 알려 주겠다고 하는 것 입니다.
거듭남의 비밀을 알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사람들 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알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엄청난 비밀을 알고 있는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들 입니까? 그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반복적으로 우리라는 단어를 쓰시는데, 그 우리라는 단어 안에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들어가 있는 것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라는 단어 속에 예수님을 비롯하여 거듭남을 통해서 이 땅에서 보여지는 거듭남의 열매를 알아보고 하늘의 것 또한 계시로 받아서 알게 될 하나님 백성 모두를 포함하고 계신 겁니다. 그 안에 내 이름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있겠습니까?
구약 성경 전체는 이 은혜의 복음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구약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던 바리새인, 이스라엘의 선생, 유대인의 관원 ‘니고데모’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즉 거듭남이라는 것은 아무리 똑똑하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물과 성령이 부어지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를 하거나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것 입니다. 이 간단하고 단순한 복음을 아무리 똑똑하고 머리좋은 사람도 못알아 듣습니다. 그럴수 밖에 없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못알아 듣습니다. 아무리 올바른 복음을 전해줘도 자기가 원하는대로 해석을 해서 그 안에 엉뚱한 것을 쌓아놓고 있는 것 입니다.
10절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도, 아무리 똑똑해도, 성경을 원문으로 다 외워도, 물과 성령이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집에게 이르기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내가 너희를 위해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고 너희가 이교도들에게로 들어가 그들 가운데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해 행하느니라. 이교도들 가운데서 더럽혀진 내 큰 이름 곧 너희가 그들의 한가운데서 더럽힌 그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하리니 내가 그들의 눈앞에서 너희 가운데서 거룩히 구별될 때에 내가 주인 줄을 이교도들이 알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이교도들 가운데서 취하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 너희 땅으로 데려가리라. 그때에 내가 정결한 물을 너희 위에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되 너희의 모든 더러움과 너희의 모든 우상으로부터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라. 또 내가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 살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너희에게 살로 된 마음을 주리라. 또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하여금 내 법규 안에서 걷게 하리니 너희가 내 법도를 지켜 행하리라. 또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에스겔 36:22~28>
아무도 물과 성령이 없이는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에스겔서에 물과 성령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한다는 구절이 나타나 있는데, ‘니고데모’는 못알아듣고 이 구절을 못떠올리고 있다는 것 입니다.
에스겔서 36장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백성으로 택하시고 남편으로 손을 잡고 구원해 냈는데도 계속 딴짓을 하니까 뚫고 들어가셔서 아예 마음을 바꿔 버리겠다고 하시는 것 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서 37장에는 에스겔이 마른뼈가 가득 쌓인 골짜기로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 생기가 들어가자 그 마른뼈들이 덜그럭 덜그럭 붙더니 커다란 군대가 된다는 것 입니다.
생기 즉 성령이 들어가자 아예 가망없는 마른뼈가 살아나는 것 입니다. 그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선생 ‘니고데모’는 이를 못알아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이 사실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이 사실을 알고 계시다는 것이 여러분 안에 성령이 있다는 증거 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십니까? 빌 게이츠 처럼 부자로 살아보고 싶으세요? 명예와 권력을 갖고 싶으세요? ‘니고데모’처럼 모든 것을 가진자가 되고 싶으세요?
아닙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 입니다. 우리의 신분을 왜 모르십니까?
이 후에 등장하는 거듭난 니고데모
니고데모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이 후에 두번 더 등장합니다.
지금 ‘니고데모’는 사람들이 두려워 밤에 찾아왔지만 이후에 등장할 때는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할 때, 이스라엘에 법이 없냐고 항의하다가 비난을 받고, 예수님이 죽자 장사를 지내려 몰약과 침향을 갖고 나옵니다.
또 처음에 예수님께 밤에 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알로에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오니라. <요한 복음 19:39>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가 아니였으면 예수님은 당시의 관습에 의해서 쓰레기 장에 버려졌어야 했습니다. 당시에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고 시체를 가족들이 찾아가지 않으면 그냥 쓰레기장에 버려졌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밤에 찾아갔던 ‘니고데모’가 주님의 시체를 찾아갔습니다. 처음엔 사람들일 알까봐 전전긍긍 했지만 이제는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이 무섭지 않게 된 것 입니다. 예수님을 잡자고 했을때,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그가 막아 섰습니다.
거듭난 자들에게는 세상의 핍박과 조롱이 두렵지 않은 것 입니다. 이제 나에겐 확고하게 변하지 않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니고데모’ 역시 그에게 있던 가문, 재산, 평판, 권세가 중요하지 않게 된 것 입니다. 그 역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계시며 무엇을 자랑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재산, 건강, 명예, 지식을 자랑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비판, 조롱, 손가락질이 두려우십니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셨다면 이것들과 이별하는 것 입니다.
구원이 최고의 선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