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일기

산부인과에 웬 사제가

namsarang 2009. 7. 12. 11:29

[사목일기]

산부인과에 웬 사제가


                                                                                                                      박공식 신부(광주대교구 이주사목 담당)

10년 전 사제품을 막 받고 첫 본당에 보좌신부로 발령 받았을 때다. 남성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 참석했다가 2차 주회에 함께 가게 됐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단원 한 분이 자신이 의사라며 나를 평생 VIP로 모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함께 한 다른 이들이 웃기 시작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 의사는 다름 아닌 산부인과 의사라는 것이다. 하하!
 며칠 전 한 결혼 이주민여성이 부인과 질환으로 없는 돈에 고생이 많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의 정의감이 발동했고 모든 인맥을 동원해 아는 신자 딸이 운영한다는 산부인과를 소개 받았다.
 그런데 그 다음이 참으로 난감했다. 그 이주민 여성 남편은 직장을 다니니 같이 산부인과에 가주기 힘들 것 같고 또 내가 소개시켜 준 의사니 그 여성 혼자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그 이주민 여성과 함께 가기로 했다.
 내 차로 그 여성과 함께 가는데 그가 서툰 한국말로 "신부님 죄송해요. 산부인과는 남편이랑 가야하는데 말이에요."라며 미안해 했다. 그 말을 듣고나니 문득 그 여성과 함께 가는 내가 좀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부인과는 남편이랑 가야하는데 내가 왜 가야해?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로만칼라를 한 신부가 산부인과에 나타나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 여성에게는 애매한 대답으로 얼버무리다 순간 주님께 물었다. "예수님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예수님은 대답은 않으신 채 나에게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의 심판' 부분을 되뇌게 하셨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평생 VIP로 모시겠다고 해도 가지 못했던 산부인과지만 내 양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찾아가야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내가 지옥을 간다 해도 그것을 각오하겠다'는 바오로 사도 말씀이 생각나면서 기쁨이 용솟음쳤다. 사목자의 행복이 이런 것이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 그 여성의 결과가 좋았고 또 산부인과 의사는 내 부탁이면 얼마든지 어려운 이들을 돕겠다고 했다. 내 삶의 역사에 어느 여성과 산부인과에 함께 간 거룩한 새 기록을 세운 날이었다.

'사목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벼룩간의 간  (0) 2009.07.15
천국의 열쇠  (0) 2009.07.14
돈 걱정 안하고 사는 비결 없을까요?  (0) 2009.07.07
단식과 담요  (0) 2009.07.06
일 없습니다   (0) 2009.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