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남 신부(수원교구 민족화해위원회 부위원장, 퇴촌본당 주임)
수원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소속으로 중국에 파견돼 3년 정도 머물렀다. 한번은 파견된 지역 한인소식지에 전화번호를 공개했다. 어느 날 걸려온 전화는 나를 두근거리게 했다. '다른 곳'에서 왔다는 그 사람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가 정해준 곳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어떻게 할까를 많이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또 어떻게 한국으로 그를 보내줄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도 들었다. 그와 만나기로 한 '개발구' 커피숍에 도착해 한참을 기다렸다. 한 여성이 들어왔는데 전화한 그 사람임을 직감했다. 인사를 하고 그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청했다. 그는 중국 것과 그쪽 것 두 가지를 다 보여 주었다. 아무 것도 안 마시겠다는 그에게 억지로 따뜻한 우유 한잔을 권했다. 그는 이미 중국에 나온 지 4년이 됐고 그동안 두 번이나 고향에 다녀왔으며 체포된 적도 있었다. 자신에 대해 한참 이야기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이보다 5살 이상 더 들어 보이는 얼굴에는 어딘가에서 긁힌 깊은 흉터가 있었다. 말을 하면서도 계속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에게 물었다. "남한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드릴까요?" "일 없습니다."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그러면 왜 저에게 연락을…?" "저는 여기가 좋아요. TV 통해서 이미 알고 있어요. 그냥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나 그 진정성이 의심스러운, 값싼 동정으로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는 겸손하지 못한 우월감의 사람이었다. 왜 그를 보았을 때 나는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왜 동등한 인격과 인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를 먼저 보내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다 식어버린 그의 우유 잔을 바라보며 내 커피를 마셨다. 섣부른 나의 판단, 이것이 문제였다. 화해와 일치 그 바탕에 존재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존중이 아닐까? 그 이후 그에게서 다시는 연락이 없었다. 신부로 살아가는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이미 그는 알아버린 것 같아 부끄럽다. 지금도 교구 민화위 일을 하고 있지만 늘 부끄러울 따름이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이 있는 6월에 북한에 있는 주민들에 대한 배려를 먼저 생각하고, 민족의 힘들었던 과거에 대해 먼저 서로 용서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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