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일기

할머니라는 말에 화난 할머니

namsarang 2009. 9. 7. 21:11

[사목일기]

할머니라는 말에 화난 할머니


                                                                                  박용식 신부(원주교구 횡성본당 주임)

   어느 주일 미사 후 친교 시간에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할머니 한 분에게 커피를 권했다. "할머니 커피 드세요." 그러자 그 할머니가 "나, 할머니 아니에요"라며 버럭 화를 냈다. 너무 당황하고 민망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뭐라고 부르죠?"라는 내 말에 그 할머니는 "그냥 데레사라고 불러주세요"라고 했다.
본당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신자들을 파악하지 못하던 터라 그 할머니의 이름도 나이도 모르고 있었다. 그 할머니의 머리는 백발이었고 외모나 옷 입은 모습이나 모든 게 70대 후반 할머니였다. 후에 교적에서 찾아보았더니 69살이었다. 나이보다 10여 년 많아 보이지만 70살이 다 된 할머니임에는 틀림없었다.

 나이가 들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다. 자녀를 혼인시켜 손주들을 볼 나이가 된 사람들은 누구나 할머니, 할아버지다. 본인이 30대 초반에 결혼을 하고 자녀들이 30대에 결혼을 할 경우 본인이 60대가 되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 것은 숫자로 볼 때 당연한 순리다.

 나는 40대부터 할아버지 소리를 들으며 지내왔다. 형의 손주들에게 나는 작은할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결혼을 했더라면 지금은 작은할아버지가 아닌 친할아버지가 됐을 것이다. 유치원 애들이 볼 때는 더 더욱 할아버지다. 자신들의 아빠와 비교가 안 될 만큼 나이가 많기 때문이다.

 나이 60이 넘으면 젊은 척해도 실제로는 젊은 것이 아니다. 마음이 젊을 수는 있지만 몸까지 젊은 것이 아님을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 가끔 젊은이와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한다고 해서, 가끔 '젊어 보인다'는 아부성 발언을 듣는다고 해서 정말로 젊은 줄로 착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동시에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젊은 엄마 아빠보다 인생을 더 살았으니 더 성숙해야 하고 인생 경험이 더 많으니 현명해야 하고 존경받기 위해서는 더 모범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자신이 할아버지, 할머니임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한다면 그것은 미성숙이거나 무책임이거나 착각에 빠진 자아도취일 것이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고 발악을 한들, 할머니이면서 할머니가 아니라고 억지를 부린들 흰 머리가 검어질 리도, 주름살이 펴질 리도 없다. 오히려 젊어서 못다 한 사랑과 봉사의 모범을 보이며 사는 것이 자신의 나이를 부정하며 앙탈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데레사씨, 다음에는 누가 할머니라고 불러도 화내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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