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일기

안당 할아버지

namsarang 2009. 11. 7. 16:55

[사목일기]

안당 할아버지


                                                                                 황재모 신부(안동교구 신기동본당 주임)


우리 본당 교우들 중 최고령인 분은 올해 93살 되는 안당(안토니오) 할아버지이시다. 이 할아버지는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대화라도 나누려면 귀에다 대고 제법 큰 소리를 내야 한다. 어떤 경우에 너무 크게 얘기를 하면 "왜 소리를 질러?" 할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함께 살고계신 할머니와 대화를 할 때 보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할아버지가 다 알아 들으신다. 심지어는 할머니가 혼자 중얼거리는 것도 그걸 대충 알아듣고 "뭐라고?" 하면서 대답하시니, 그것 참 신기한 노릇이다.
 귀가 어두워 그런지는 몰라도 안당 할아버지는 항상 제대 바로 앞자리에 앉아 미사시간 내내 본당신부의 입만 쳐다보신다. 본당신부가 하는 말을 조금이라도 더 알아들으려는 절박한 몸짓처럼 보인다. 그리고 보편지향기도의 첫 번째 기도는 항상 안당 할아버지 차지다. 「매일미사」에 나와 있는 기도를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한 주간 내내 주일복음을 묵상한 뒤 미리 정성껏 기도를 준비해 오셔서 '교회를 위한 기도'를 또박또박 바치신다. 전례력은 물론이고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면서 진정어린 마음에서 기도를 준비해 오시기에 안당 할아버지 기도는 주일미사를 한층 더 거룩하게 만든다. 이렇게 하신 지가 벌써 십 수 년은 됐다고 하니 참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지난 겨울 시작 무렵, 미사를 마치고 교우들과 인사를 나누는 본당신부에게 오셔서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제는 더 이상 기운이 없어 보편지향기도를 바치지 못하겠다고 하신다. 그 눈에 얼마나 많은 아쉬움과 회한이 보여지던지…. 그러고는 몇 주 지나고 그만 자리를 차지하고 누우셨다. 그리고 병자영성체를 청하신다. 성체를 모시고 가는 날이면 면도를 깔끔하게 하고 옷을 단정히 차려 입고 정중히 기다리신다. 한번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서라도 본당 미사에 참여해 보려고 집을 나섰다가 그만 넘어져서 크게 다친 적이 있으셨다. 그리고는 이제는 정말 본당 미사에 나오지 못할 것 같다고 아쉬워하신다.
 그러던 안당 할아버지가 날씨가 풀리고 화창해지기 시작하던 지난 초여름부터 놀랍도록 기운을 차리시더니 마침내 주일미사에 다시 나오기 시작하셨다. 본당 모든 교우들은 다 같이 한마음으로 기뻐하면서 큰 박수로 환영 인사를 드렸다. 요즘도 거뜬히 주일미사에 참석하신다. 그러나 더 이상 보편지향기도는 바치지 않으신다. 기운이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이제는 오히려 기도를 바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 눈치이다.
 날씨가 쌀쌀해졌다. 겨울나기를 무척 힘들어하시는 할아버지가 이번 겨울에도 무고하게 잘 견디어 주시길 기도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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