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일기

어머니

namsarang 2009. 11. 16. 21:12

[사목일기]

어머니


                                                                                황재모 신부(안동교구 신기동본당 주임)

   사제관 뒷마당에 개 두 마리를 키운 적이 있었는데 우리 본당 교우들은 이놈들을 초복이, 중복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놈들은 이름에 걸맞게 올 여름을 무사히 넘기지 못했다. 역시 개나 사람이나 이름을 잘 지어야 하는 모양이다. 물론 나도 ○○탕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직접 키우던 개를 후루룩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찜찜하다. 그런데 사제관에 함께 살고 있는 어머니는 "아냐, 이런 개가 더 맛있어"라고 하신다. 참 어이가 없다. 당신이 매일매일 밥 챙겨주고 예뻐하셨던 놈들이었는데 말이다.

 얼마 후 사제관에 '소망이'라는 작은 똥개를 한 마리 분양받아 또 키우게 됐다. 그런데 이놈은 워낙에 덩치가 작은 종자라서 아무래도 후루룩 하는 용도는 아니다. 요즘 어머니는 소망이와 하루 종일 대화를 하신다. 욕을 하면서 야단을 치기도 하고 귀여움을 떠는 개가 예뻐서 혼자 막 웃기도 하신다. 밥을 줄 때는 어린 아이 달래듯이 타이르면서 밥을 주신다.

 한번은 주방에서 어머니가 "밥 줄까?"하고 물으신다. 그래서 "응, 밥 줘"하고 대답을 하고는 한참을 기다려도 밥 먹자는 말씀을 하지 않아 주방으로 가 보니, 아까 했던 소리는 나한테 한 것이 아니라 소망이에게 하신 것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돌아와 혼자 웃기만 했다.

 어머니께서 큰 장을 볼 때는 내 차를 이용해 시내 대형마트로 함께 가곤 하는데, 그럴 때 어머니는 사야할 품목을 미리 메모해 가신다. 메모라고 해봐야 평화신문 귀퉁이를 찢어 거기에다 삐뚤삐뚤한 필체로 대충 쓰신 것인데 내용은 대충 이렇다. '계랄(계란), 봉봉(퐁퐁), 요구로도(요쿠르트), 도마도(토마토)…' 얼마나 우스운지 모른다.

 비가 시원하게 내리던 어느 날, 턱을 괴고 비오는 창밖을 한참 동안 내다보시는 어머니를 본 적이 있다. 그 모습이 열댓 살 밖에 안된 사춘기 소녀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 스스로가 더 놀라웠다.

 첫 본당으로 발령받아 갔을 때에도 함께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참 많이도 다퉜다. 아니 일방적으로 내가 짜증을 많이 부린 것이다. 아들을 너무 과하게 걱정하고, 이미 성인이 된 아들에게 자꾸만 잔소리를 하시는 것 같아 짜증을 부렸던 것이다.

 가난한 살림에 4남 4녀를 키우시면서 힘겨웠던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렇지만 하루도 기도를 소홀히 한 적 없이 평생 신앙인으로서 의연함을 지켜온 분이 나의 어머니시다.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요즘은 과거 어느 때보다 모자지간에 사랑의 관계가 무르익고 있다. 사십대 중반이 돼서야 비로소 내가 조금씩 철이 드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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