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 전북 이리역(현재 익산역) 주변은 집중 폭격을 당한 듯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 화약 호송원 신모(당시 36세)씨가 켜놓은 촛불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으면서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40t을 실은 화물열차가 폭발한 것이다.
이 사고로 철도원 9명과 시민 등 총 59명이 숨지고 1400여명이 다쳤다. 또 주택 7800여채가 잿더미가 됐다. 이날은 금요일이었다. TV에선 테헤란에서 열린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대양주 최종 예선 한국-이란전이 중계방송되고 있었다. 주말을 앞두고 일찌감치 퇴근해 축구를 보던 주민들이 날벼락을 맞았다.
폭발 현장에는 깊이 15m,폭 40m의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반경 500m안쪽의 건물들은 산산이 부서졌다. 우리나라 대형 폭발사고 1호로 기록된, 당시로서는 전무후무한 참사였다.
- ▲ 이리역의 폭발사고로 주택 7800여채가 잿더미가 됐다.
사고 이튿날 조선일보는 1면에 '裡里(이리)서 史上(사상) 최대 爆發慘事(폭발참사). 1천여명 사상…全 市街(전 시가) 아수라. 쾅 하자 停電(정전)…마치 戰爭(전쟁)터 방불'의 제목으로 사고 현장을 전했다.
익산시는 참사 30주년인 2007년과 31주년인 작년,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행사를 벌였다. 올해는 시 차원의 기념행사는 없고, 민간단체인 이리역 폭발사고 추모사업회가 11일 오후 2시 익산역 앞에서 추모의 자리를 마련한다.
이후 대형 폭발사고는 잊힐 만하면 한 번씩 터졌다. 1993년 6월 10일 경기도 연천 예비군 부대 폭발사고로 19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4년 12월 7일 서울 아현동에서 계량기 점검 도중 새어나온 가스가 환기통 주변 모닥불에 점화되면서 폭발해 12명이 죽고 100여명이 다쳤다.
1995년 4월 28일에는 대구 상인동 영남고교 네거리의 지하철 공사장 폭발사고로 등굣길 학생 42명을 포함, 101명이 죽고 200여명이 다쳤다. 도시가스 배관이 뚫리면서 가스가 지하철공사장으로 유입돼 폭발한 사고였다. 280㎏짜리 철제 복공판 1000여장이 공중으로 튀어올랐고, 수십m에 달하는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1998년 9월 11일 경기도 부천시 LP가스 충전소 연쇄 폭발사고는 96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후 잠잠하던 폭발사고가 지난해 다시 한 번 전 국민을 놀라게 했다. 작년 1월 경기도 이천의 냉동창고 폭발 화재사건으로 50명의 사상자를 낸 것이다. 32년 전에 발생한 이리역 폭발사고는 지금 우리에게 담당자들이 '기본'을 망각하고 아차하는 순간, 인명과 재산을 한꺼번에 앗아가는 대형 참사로 이어진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