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발간 '오키신보'… "고유영토 아니었음" 입증
독도(獨島)가 일본 땅이 아니라는 자료는 얼마나 더 쏟아져나올까? 이번에는 1905년 이전부터 이미 독도가 자기들 '고유 영토'였다는 일본의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러일전쟁 당시의 자료가 새로 발굴됐다.한국해양수산개발원 독도·해양영토연구센터의 유미림 책임연구원은 "독도가 원래 일본의 영토가 아니었음을 밝힌 1905년의 일본 자료 '오키신보(隱岐新報)'를 찾아냈다"며 자료의 사진을 공개했다.
'오키신보'는 시마네현(島根縣) 오키시마(隱岐島)에서 1904~05년에 발간된 잡지다. 1905년 3월 '오키신보' 16호는 '오키 국경의 팽창'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우리 도민이 예로부터 도항하던 두 개의 섬과 많은 작은 섬들이 공식적으로 다케시마(竹島·독도를 일본에서 일컫는 말)라는 이름으로 오키 영토가 된 건 기쁜 일"이라는 내용이다.
이는 '다케시마가 일본의 고유 영토'라는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 글은 또 "섬 자체가 매우 작기 때문에 바다짐승(海獸·강치)과 그 밖의 해산물을 함부로 잡지 말아 무한한 이익을 얻는 섬으로 만들자"고 했다. 현재 도쿄대(東京大)가 소장하고 있는 이 잡지는 1904년 1월부터 1905년 3월까지 모두 16호가 남아 있다. 발행인은 당시 '오키도지(島誌)' 편찬을 주도하던 오키도청의 서기관 오사다 와카지(長田和加次)의 형 오사다 요시이치로(長田能一郞)다.
- ▲ 일본의‘독도 고유 영토론’을 뒤집는 글이 실린 러일전쟁 당시의‘오키신보’(왼쪽)와 독도 전경. / 조선일보 DB
유미림 책임연구원은 "이 사설은 일본이 당시 독도 편입을 '영토의 팽창'이라는 인식하에 강행했음을 드러낸다"며 "일본 정부가 주장해 온 '고유영토론'의 허구성을 다시 한번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다.
'고유영토론'이란 무엇일까? 독도가 300년 전부터 일본 땅이었다는 억지 주장이다. 일본은 1618년 요나고(米子) 주민 오야 진기치(大谷甚吉) 등이 돗토리(鳥取) 번주를 통해 막부로부터 울릉도 도해(渡海)면허를 받은 뒤 17세기 중엽까지 독도 영유권을 확립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도해 면허'가 외국에 나가 고기잡이할 때 발급했던 것이므로 오히려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로 보지 않고 있었다는 입증이 된다. 일본에서 독도를 처음 기록한 1667년의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紀)'는 일본의 서북쪽 경계가 오키시마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일본은 러일전쟁 중이던 1905년 1월 28일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하기로 결정하고 시마네현의 현보(縣報)에 슬그머니 고시했다. 일본은 이것이 "다케시마 영유 의사를 '재확인'한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렇다면 1905년 '시마네현보 고시'는 정당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보다 5년 전인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은 '칙령(勅令) 제41호'를 통해 울도군(鬱島郡)의 관할구역에 석도(石島=독도)가 포함된다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당시 울릉도 주민들은 '석도'를 훈독해 '돌섬'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변해서 '독도'가 됐다. '오키신보'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최근 일본 시마네현의 '웹 다케시마문제연구소' 홈페이지에 실린 글이 계기가 됐다.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발굴한 사료가 오히려 일본의 '고유영토론'을 뒤집는 역할을 한 것이다.
최근 ▲한국측 사료에 나오는 우산도(于山島)가 독도임을 증명한 조선 후기 박세당(朴世堂)의 기록 ▲독도를 조선의 고유 영토로 표시한 19세기 일본 고지도 '조선국도' ▲독도를 조선의 부속 도서라고 밝힌 제정러시아 해군 지도 ▲독도 동쪽에 해상 경계선을 그은 1894년의 프랑스 신문 '르 프티 주르날' 등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무력화하는 자료가 속속 나오고 있다. 올 1월에는 독도를 '일본의 부속 도서'에서 제외한 1951년의 일본 법령 '대장성령 4호'와 '총리부령 24호'의 존재가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