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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새벽 저도 손님태우고 현장지나며 '사람많이 죽겠다' 했죠

namsarang 2010. 1. 11. 12:06

[최보식이 만난 사람]

그날 새벽 저도 손님태우고 현장지나며 '사람많이 죽겠다' 했죠

'용산 장례' 이후… 당시 숨진 김남훈 경사 아버지 김권찬씨
제 아들은 운이 없어 숨져 그 누구도 원망 안해요 보상금 액수요? 아들 죽은후에 무슨 필요
집사람 심장병에 우울증 길에서 경찰만 보여도 "내아들 내놔라" 울부짖어

"오늘 새벽 5시쯤 대전 현충원의 아들 묘소에 다녀온 뒤 용산 철거민 장례식에 가려고 했지요. 잘잘못을 떠나 일년 가까이 장례식을 못 치렀으니 마음이 아프실 것 아닙니까. 같은 현장에서 아들도 희생됐기 때문에 한번 찾아뵈려고 마음먹었지요…"

서울 신림동 4거리의 동네 음식점에서 우리는 종이컵 녹차 한잔씩을 두고 마주앉았다. 용산 진압 과정에서 숨진 고(故) 김남훈 경사의 아버지 김권찬(56)씨는 두툼한 점퍼 차림이었다. 그는 개인택시 운전사다.

숨진 용산 철거민의 장례식이 '국민장' 이름으로 열렸을 때 그는 이 장례식에 '아무도 모르게' 가서 조문을 할 작정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새벽 일찍 자신이 모는 택시로 대전 현충원의 아들 묘소부터 찾았다. 거기서 30분쯤 서성거리며 마음 정리를 한 뒤 올라왔다고 했다.

"똑같은 피해자고 죄가 밉지 사람이 미운 게 아니지 않습니까. 쭉 그렇게 생각해왔죠. 아무도 알아보지 않게 그냥 조문만 할 생각이었지요. 집에서 아침을 먹고 나서려는데, 장례식장에 먼저 가본 친지로부터 '여기선 경찰을 가해자라고 하더라'는 전화를 받았어요. 경찰인 내 아들이 가해자라면 나는 가해자 아버지이고, 내가 조문하면 마치 가해자로서 사과를 하는 것처럼 됩니다. 그래서 종일 집에서 누워 있었어요."

―농성세력은 처음부터 '경찰이 가해자'라고 주장해왔는데, 그게 새삼스러운 것이었나요?

"저는 처음 듣는 얘기였어요. 그쪽에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란 소리는 들었지만 '경찰이 가해자'라고 할 줄은 몰랐어요. 숨진 우리 아들이 가해자입니까, 우리가 가해자입니까. 똑같이 생명을 잃은 입장에서 저는 서로 화합과 용서, 이해를 생각했는데."

―이해가 안 되는군요. 정말 '경찰이 가해자'라는 그쪽 주장을 처음 듣습니까?

"제가 그런 걸 잘 모르고, 잊고서 살아왔어요. 도대체 책임자 처벌을 어떻게 하라는 거죠? 책임자가 김석기 전 청장입니까, 아니면 누구입니까? 용산 현장 앞 왕복 8차선 도로에 차가 얼마나 많이 다닙니까. 그날 새벽 6시반쯤 제가 서울역으로 가는 손님을 태우고 그 길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건물 4층에서 화염이 피어오르고 있었지요. 아들이 그 현장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죠. 돌멩이가 아래로 날아들어 경찰이 도로를 통제해 차들을 용산역 쪽으로 우회시켰습니다. 저도 돌아갔습니다. '저러다가 사람 많이 죽겠다'고 손님과 그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바로 거기서 우리 아들이 죽었습니다."

―경찰특공대인 아들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지요?

"사건 전전날 밤 10시쯤이었지요. '다음날 비상이 있어 일찍 나갈 것'이라고 했어요. 뭐 그러려니 하죠. 다음날 새벽엔 서로 못 봤어요. 저도 새벽 5시면 택시 영업을 나가는데, 아들이 먼저 나갔는지는 모르겠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용산에 있는 줄은 몰랐죠. 그날 상황에서 경찰이 방치해뒀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저도 여러 생각이 많지만 말은 못 하겠어요. 이제 유가족들도 한 걸음 물러서서 편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서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김권찬씨는“나는‘없는 사람’으로서 농성철거민들이 안 됐고, 경찰 가족으로서는 경찰이 불쌍하다”고 말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그전에 유족이나 농성자들과 교류가 있었습니까?

"없었어요. 용산 참사 현장에 꼭 한번 간 적이 있었지요. 두달 전 집사람과 도로변에 택시를 세워놓고, 바로 옆에서 그 장소를 쳐다본 적이 있습니다. 마음속에는 아들이 숨진 건물 4층에 올라가서 확인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농성자들과 혹 갈등이 생길까봐, 경찰 아들을 둔 부모로서 봉변당할 수도 있고, 결국 못 올라갔지요. 관할 용산경찰서에 말해서 한번 올라가 확인해볼까도 생각했는데, '아들이 이미 죽었는데 구태여 봐서 뭘 하나'며 가슴에 와 닿지 않더라고요."

―당초 사건이 터진 직후 검·경찰이 조사할 때 현장을 볼 수 있었을 텐데요.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그땐 경황이 없었지요. 택시를 몰다가 점심을 먹으려고 집에 들어와 있을 때였지요. 경찰로부터 '아들이 진압 과정에서 행방불명됐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과학수사연구소에서 감식을 한 뒤 저녁쯤 시신을 경찰병원으로 보내왔어요. 병원에서 거의 미칠 듯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의 눈을 쳐다보니 나는 질문이 자꾸 꺽꺽 막혔다.

―불탄 시신에서 아들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까?

"얼굴 한쪽은 불에 타 허물어져 몰라보겠고, 한쪽은 안 타 아들이 확실히 보였고요, 우리 아들이라는 게 눈에 딱 들어왔죠. 시신은 저 혼자서 봤지요. 집사람은 사망 소식에 거의 실신했으니까요. 경찰특공대에서 아예 안으로 들여보내 주지 않았어요. 아마 봤으면 아들과 똑같이 세상을 떠났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집사람은 그 뒤로 심장이 때로 불규칙하게 뜁니다. 우울증까지 걸려서 도로에서 경찰만 보여도 얼굴이 달아오르고 '우리 아들 내놓아라'며 부르짖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딸아이가 직장을 그만두고 제 엄마 곁을 늘 지키고 있습니다. 저도 멀리 못 갑니다. 택시를 몰지만 신림 4거리에서 서울대까지만 왔다갔다 맴돕니다. 집에서 연락이 오면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하니까요. 처음에는 일이 손에 안 잡혀 개인택시를 팔려고 내놓기도 했지요. 무엇보다 교통경찰을 보면 아들 생각이 나고…."

―부인이 원래 우울증이 좀 있었습니까?

"아들이 죽고서 그렇게 된 거죠. 그전에는 너무나 건강했는데. 남자와 여자가 다른 점이 있어요. 남자는 술 한잔 마시고 세월이 지나면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애써 아들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아들 방에 있는 '경찰' 마크가 있는 유품은 대부분 태웠어요. 남은 제복을 방에 걸어놨다가 어느 날 보자기에 쌌어요. 그러자 집사람이 '아들이 없어졌다. 우리 아들이 어디에 갔나'고 헛소리를 해요. 그래서 옷을 다시 걸어뒀습니다. 그저께는 아들이 꿈에 나타나 '경찰 구두 하나를 태워달라'고 했답니다. 관악경찰서 경무과에 가서 차마 '태운다'는 말은 못하고 '내가 신는다'고 거짓말하고 하나 구해놨습니다. 그걸 오는 20일 아들 1주기에 현충원 묘소에서 태워주려고 합니다."

―경찰인 아들이 철거민 불법 농성자로 인해 죽었다는 원망은 없었나요?

"당초 '없는 분'들만 시위를 했다면 저렇게 피해가 안 컸을 겁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로 더 과격해졌죠. 아들은 용감해서 제일 앞장서 들어갔는데 시너를 뿌려놓고 불을 붙이니…. 하지만 그분들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은 안 하고, 운이 없어 죽었다고…."

―그러면 경찰 수뇌부의 조기 진압 명령에 문제가 있어 숨졌다고 봅니까?

"경찰 총수가 자기 부하들을 죽으라고 투입시키지는 않겠지요. 숱한 재개발이나 노조 파업 쪽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럴 때마다 경찰이 투입됩니다. 정리를 시키려고 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아들은 경찰관이고,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경찰관이니, 그 임무를 한 겁니다. 김석기 전 청장은 퇴임하고도 자주 찾아왔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자택으로 찾아갔을 때 사모님이 주차장까지 나와 저희 집사람을 끌어안고 우셨어요. 관악경찰서 서장님과 경무과장님도 고마운 분입니다. 가끔 찾아오시고, 집사람을 위해 약도 보내주셨어요."

작년 1월 20일 새벽 용산 진압 현장

―자식이 불타 숨졌는데 누구에게도 원망이 없나요?

"예. 저는 경찰의 아버지로서 경찰의 가족으로서 경찰이 불쌍하기도 해요. 우리나라에서 궂은 일은 경찰이 다 하지 않습니까. 다 하면서도 항상 욕먹는 게 경찰입니다. 마찬가지로 용산에서 숨진 고인이나 유가족들에게 조금의 감정도 없습니다. 저도 없이 살아봤고, 입장을 바꿔서 없는 분들의 심정을 잘 알아요. 오로지 '저분들도 안됐다'는 마음뿐이지요. 없어서 세 들어 상가를 하던 분들이 재개발을 해버리면 얼마나 막막하겠습니까. 자기들에게는 소유권이 없어요. 어디로 가겠습니까. 들어가 살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데. 그래서 망루에 올라가 투쟁한 것이지만…. 너무 과격했어요. 물론 그분들은 과격하게 했다고 생각지는 않겠지요."

그도 신림동의 무허가 주택에서 33년째 살고 있다. 재건축을 해 27평형(89㎡) 아파트에 사는 게 꿈인 적이 있었다고 했다. 한때 재건축조합 총무를 맡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되지도 않을 꿈을 2년 전에 그만 접었다"고 했다.

―숨진 용산 철거민 유족들은 약 35억원으로 협상을 타결했다는 말이 들리더군요.

"그 위로금에다 뭐 다른 것까지 준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어떻든 일년 동안 추위 속에서 밥 해먹고 생활하는 것을 보니 안 됐고, 제 마음도 아팠어요. 그러니 타결된 것으로 저는 마음이 편합니다."

―일각에서는 정당한 공무 수행을 한 아들의 보상금이 불법 농성자보다 적다며 '이걸 어떻게 정의(正義)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합니다.

"아들이 죽었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저는 조금도 욕심이 없습니다. 보상금은 저와는 무관합니다. 비록 이혼을 했지만 아들은 결혼을 했고, 손녀가 있어요. 매달 연금이 손녀 앞으로 나가고 법적으로 보상금도 그 아이 것이에요. 그 손녀를 우리가 길러 왔는데, 아들이 죽고서는 애 엄마가 기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리 보냈어요. 보상금도 다 그쪽으로 갔지요. 그 돈을 잘 간직해야 하는데…. 돈이란 사람이 살고 있음으로써 필요한 거지 죽으면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설령 보상액을 따지고 제가 그 돈을 쓴들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저는 숨진 아들이 하늘나라에서도 좋게 생활하고 봉사를 많이 했으면 바랍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숨진 아들이 하늘나라에서 봉사를 하라고요?

"예. 저는 이 동네에서만 33년을 살면서 봉사활동을 많이 해왔습니다. 그게 제 삶의 보람이었지요. 여름에는 꼭 분무기통을 메고 동네 하수도 소독을 해왔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소독사 아저씨'로 알고 있지요. 작년에 아들이 죽기 전까지는 새마을지도자협의회 회장을 맡아 일했고 활동비를 아껴 학생들 장학금을 줘왔지요."

―선생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대체 얼마나 배운 분입니까?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혹시 아들을 경찰 시킨 것에 대해 후회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특전사 중사로 제대해 경찰 특채 시험을 봤어요. 두 번 떨어지고 세 번 만에 붙었습니다(2003년). 그때 아들에게 '경찰이 돼서 항상 국민들을 위해 잘 봉사하라. 넌 젊으니까 봉사를 많이 하라'고 했지요."

―아들에 대한 어떤 기억이 가장 선명합니까?

"아들은 경찰서장의 꿈이 있었습니다. 승진 시험용 책을 많이 사봤어요. 이번 시험에 붙으면 집 근처인 관악경찰서로 옮기겠다고 했어요. 죽기 일주일 전에는 제 어머니를 드라이브시켜준다고 한강 다리를 건너 특공대 건물로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아직도 아들이 살아 있다고 믿고 있지만…. 아들이 죽었는데, 애비가 무엇이 잘 났다고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내가 인터뷰하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눈물을 참고 있어요."

내게도 더 이상 진행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사설]

"내 아들이 가해자 돼버렸다"는 사망 경찰관 아버지의 탄식

 작년 1월 20일 용산 참사 때 숨진 경찰특공대원 김남훈 경사의 아버지 김권찬씨가 "(농성자들이) 8차선 도로에 벽돌 던지고 새총 쏘고 화염병 던지는데 경찰이 투입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경찰이 가해자(加害者)가 되고 농성자들이 피해자가 돼버렸으니…"하고 말했다. 그는 농성자 5명의 장례식이 열린 9일 아들이 묻힌 대전 현충원에 다녀와서 가진 인터뷰에서 "제 자식은 32살이었어요. 어렵게 키웠는데 피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집사람은 아들이 죽은 뒤 공포증이 생겨 누가 뭐라고만 해도 깜짝깜짝 놀랍니다"라고 했다. 숨진 김 경사는 대학을 나온 후 특전사를 중사로 제대하고 2003년 경찰특공대에 들어갔다. 그는 사건 당일 벽과 바닥 곳곳에 시너가 뿌려지고 화염병이 난무하던 옥상 망루 3층까지 진입했다가 농성자가 던진 화염병 불에 타죽고 말았다.

숨진 농성자 5명의 유족은 용산 재개발조합으로부터 30억원 가까운 보상금을 받는다고 한다. 1인당 6억원 남짓이다. 김 경사 유족에겐 보상금 명목으로 일시금 1억3900만원이 주어졌고, 보훈연금으로 매달 86만원씩 지급되고 있다. 일시금만 따져볼 때 국민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려다가 순직(殉職)한 경찰관이 염산병·화염병을 던지면서 도시게릴라처럼 법질서를 유린한 농성자들이 받은 보상금의 4분의 1밖에 못 받은 것이다.

'범국민장'이라는 이름 아래 치러진 전국철거민연합 소속 3명 등 숨진 농성자 5명의 장례에선 민주당·민노당·진보신당 등 야당 대표들이 와서 조사를 읽었고, 노제(路祭)에선 시인이 조시를 낭독하고 가수가 조가를 불렀다. 이런 국민을 보고 앞으로 어느 경찰이 화염병과 벽돌을 몸으로 막으며 질서를 지키려 하겠으며, 누가 그들에게 목숨을 내놓고 불타는 망루에 올라 시민을 지키라고 명령할 수 있겠는가. 이 대가(代價)는 대한민국 국민이 두고두고 치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