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5) 일본의 간교한 '간도 외교술

namsarang 2010. 1. 16. 21:14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5) 일본의 간교한 '간도 외교술

  • 김현철 기자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9년 9월 4일, 청(淸)과 일본의 관리들이 북경에 마주앉았다. 청의 흠명외무부상서 양돈언(梁敦彦)과 일본 특명전권공사 이주인 히코키치(伊集院彦吉)는 수년간 끌어온 협상을 마무리하고 '간도에 관한 일·청 간 협약'(약칭 간도협약)과 '만주5안건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큰 거래'가 성사됐다. 청은 조선과의 오랜 분쟁거리였던 '간도 영유권'을 일본으로부터 인정받았고 일본은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탄광 채굴권을 얻어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양국은 협약 조인 후 기념촬영을 할 만큼 내용에 만족했다.

이듬해인 1910년 1월 12일 '대한매일신보'에 신채호 선생의 '만주와 일본'이란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청국과 일본 간 협약이 된 소문이 낭자하니, 더 사나운 호랑이의 태도를 가지고 사방을 엿보는 구미 열강국이 어찌 이 시대에 이익이 모인 만주천지에서 아라사(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만 마음대로 뛰놀게 맡겨두며, 또 어찌 동방의 조그마한 섬나라 일본의 활갯짓을 앉아서 보리오."

간도협약을 둘러싼 열강들의 역학관계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이 글은 독자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단재 선생의 지적대로 국제환경은 일본에 유리하지 않았다. 러일전쟁(1904~1905년) 이전까지 국제사회는 영국-러시아의 대립구도가 큰 축을 형성했다. 영국은 제정러시아의 남하(南下)를 막으려 했고 여기에 미·일이 가담했다. 반면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의 요동(遼東) 진출을 저지했다(삼국간섭). 하지만 국제사회에 '영원한 친구'란 없는 법. 러일전쟁 때 일본에 전쟁자금을 댔던 미국은 만주 철도부설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노리면서 일본의 간도 독점에 반대하고 나섰다. 러시아 역시 만주의 기득권 유지를 표명했다.

일본의 간도 진출 의지가 노골화한 것은 1906년경이다. 그해 3월 29일 조선주둔군 참모부가 육군성에 제출한 '간도에 관한 조사개요'에 그 속셈이 드러난다.

"간도는 함북에서 길림(吉林)에 이르는 도로의 요충에 해당하며 물자가 풍부하다. 만약 우리가 공격을 취해 함북에서 길림 방향으로 진출하려고 하면, 우선 간도를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과 러시아를 설득하는 일본의 외교술은 교묘했다. 미국은 정부보다 민간기업이 만주 투자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미국 기업에 투자 기회를 주겠다"고 미끼를 던졌다. 러시아는 회령~길림 간 철도가 건설되면 자국 국경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일본은 '연해주 불침략'을 약속했다. 외교 정지작업이 끝나자 일본은 청 정부에 '간도 영유권 인정'이란 '당근'을 내밀어 협약을 성사시켰다. 조선이 배제된 '엉터리 국경'은 이런 배경에서 그어졌다.

간도를 개척한 약 10만명의 한인들은 졸지에 '자기 땅'을 잃게 됐다. 나라를 잃은 후에는 일본 경찰에 모진 핍박을 당했다. 하지만 간도는 한인 독립운동의 기지로 변해갔다.

                                                                                     김현철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이사·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