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6) 호남의병, 일본군을 '우롱'하다
나라가 망할 때 민초들의 민족적 자각은 오히려 고양된다. 대한제국이 무너지기 1년 전인 1909년 9월 초 항일 의병활동이 거셌던 것이 이를 증명한다. 당시 의병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곳은 호남지역이었다. 호남의 의병 규모는 총 3천여명으로, 수백~수십명 단위의 부대가 100개 이상이나 단독 또는 연합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의병들의 활약상은 역설적이게도 일본측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조선주차군사령부가 간행한 '조선폭도토벌지'(1913)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호남의병은 세월이 가면서 더욱더 교묘함이 극에 달했고, 첩보 근무 및 경계법 등은 놀랄 만큼 진보되고 행동도 더 민첩하여 토벌대를 우롱하고 있다. 또 호남 주민들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을 접해 본 적이 없어서 일본군의 진가를 모르고 임진왜란을 회상하면서 일본인을 멸시하는 풍조에 젖어 있다. 과연 어느 때 완전 평정이 될지 우려스럽다.'
이 기록을 보면, 호남의병들이 상당한 전투력을 갖추고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공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호남은 의병이 주권을 행사하던 해방구와도 같았다. 이런 까닭에 의병들은 일본군에 체포돼도 의연하고 당당했다.
이를 가능케 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기록에 따르면, 호남의병들은 화승총을 뇌관식으로 개량하거나 연발총을 만들어냈다. '토벌지'는 또 '의병들이 목포·군산항을 통해 청국 상인에게 밀수입하거나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신무기로 무장했다'고 기록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의병들이 '유격전술'을 구사했다는 사실이다. 40세 미만의 청년들로 세대교체를 이룬 의병장들은 지리산과 여러 섬을 근거지로 소부대 중심으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가난한 유생·농민·머슴 등 평민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이동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고, 익숙한 지리정보를 활용하여 매복하였다가 일본군을 기습 공격 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호남의병의 활약에 당황한 일본은 1909년 9월부터 두 달간 '남한대토벌작전'에 나섰다. 이 작전은 사실상 호남을 초토화하기 위한 군사작전으로, 당시 많은 의병과 양민이 체포·학살됐다. 일본군은 작전에 앞서 병사들에게 "호남인들에게 일본군의 위엄과 무력에 대해 경악하고 전율케 하여 역사상의 명예를 회복하자"고 다짐했다. 그동안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일본군은 당시 '교반작전'을 폈다. 이는 한정된 지역을 수차례에 걸쳐 어지럽게 휘젓는 것으로, 항일의 뿌리를 뽑으려는 작전이었다. 일본군이 제압하고자 했던 것은 의병뿐만이 아니라 호남인들의 '항일의식'이었다. 호남의 항일의식은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 승리와 육지 의병들의 활약 덕분에 일본군이 감히 호남땅을 밟지 못했다는 자부심이다.
호남의병은 일본의 대토벌작전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이후 비밀결사 운동, 3·1운동,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지는 항일독립운동의 원천이 되었다.
김기승 순천향대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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