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천지 삼천리에/ 개국기초 사천여년 /선리건곤 오백년에 /화육(化育)중에 이천만인 /적지 않은 인구로서 /개명한 이 몇몇이냐 … 우리동포 이천만인 /남녀노소 물론하고 /급히급히 문명하여 /남의 압제 벗어나오"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8일자에 실린 '진보가'의 일부이다. 일본의 국권 침탈 야욕을 이천만 동포의 문명개화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외교권은 통감부에 빼앗기고, 군대는 해산당하고, 4500만원의 채무를 진 대한제국으로서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이천만' 인구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시 인구가 '이천만'이란 것은 정확한 것일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한국 인구가 2000만명을 넘어선 것은 그보다 훨씬 후인 1927년이었다. 안타깝게도 대한제국 말기는 자체 인구통계 기록이 없다. 조선시대 인구조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3년마다 실시된 호적대장 조사를 통해 인구를 파악했다. 그러나 누락이 많아 정확지 않았다. 조선의 인구는 1392년 개국 당시 550만명 정도였고, 그 후 연평균 0.5% 이하의 더딘 증가율을 보였다. 1511년경 1000만명을 넘어섰고, 1683년경 1500만명에 도달했다.
1909년 일본 경찰국이 식민 통치의 기초 작업으로 민적조사를 실시했는데 1293만명으로 나왔다. 하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이천만 신화'가 널리 퍼졌다. 그 까닭에 대해 '대한매일신보'(1910년 1월 9일자)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항상 말하는 바 이천만이라 함은 어느 해 어느 달에 조사한 것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요, 다만 1898년 독립협회 회원이 연설에서 '이천만 동포 형제여'라 외친 데서 시작되었다."
'이천만'이란 숫자가 근거 없음을 밝힌 것이다. 신문은 그러면서 "오호라, 그 나라 인민의 숫자를 그 나라 사람이 알지 못하여 타국 사람이 조사에 착수하여 그 숫자를 드러내고자 하니 가히 탄식할 바로다"라고 했다.
조선시대는 '다산(多産)'의 시대였다. 웬만한 집은 아이가 7~8명을 넘었다. 두세 집 아이만 모여도 한마당이었다. 그러나 질병으로 영아 사망률이 높았고 왜란·호란으로 조선 후기 인구는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인구를 어떻게 짐작할 수 있는가. 한국에 근대적 센서스가 처음 실시된 것은 1925년이었고 그때 인구가 1902만30명이었다. 학자들은 이 숫자에 0.75~1.31%의 추정 인구증가율을 대입해 1909년 인구를 1600만~1750만명 정도로 역산(逆算)한다.
당시 중국 인구는 4억명, 일본은 5000만명이었다. 한국에 비해 중국은 24배, 일본은 3배였다. 인구가 적으면 인력의 질로 승부해야 한다. 하지만 근대화에서 30년 앞선 일본에 비해 당시 한국인의 교육수준과 생산력이 낫다고 보기 어렵다. 한·일 간 인구 차이는 3배였지만, '인적역량의 총합'은 그 이상 벌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실 자각이 구한말 '교육열'의 출발점이 되었다.
전봉관 KAIST 교수·국문학
[제국의황혼 '100년전 우리는']
(8) 당시 '이천만 동포'는 정확한 숫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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