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10) "상투를 잘라야 한국이 산다"

namsarang 2010. 1. 23. 12:15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10) "상투를 잘라야 한국이 산다"

1909. 8. 29~1910. 8. 29
  • 김기승 기자

"한국은 현재 남의 나라에 상투 잡혀서 꼼짝 못하고 스스로 사망신고서를 바치고 있는 꼴을 하고 있지요. 한참은 청인(淸人)이 내 상투를 잡았지요. 그 후에 일본인이 빼앗아 쥐더니, 아라사(러시아) 양반이 얼마 주므르더니, 왜(倭) 상전님네가 다시 움켜쥐었지요."

이승만은 1909년 9월 9일 신한민보에 '상투를 없애야 되어'라는 글을 기고했다. 당시 이승만은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던 중이었다. 논문 쓰기도 바쁠 텐데 '한가하게' 상투 얘기를 신문에 기고한 까닭은 뭘까.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1904년 말, 독립활동 혐의로 7년간 옥살이를 한 뒤였다. 그해 초 고종 황제는 러일전쟁 발발을 예상하고 '국외중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일제의 동맹조약 체결 강요로 전쟁에 휘말려 들자, 고종의 측근이었던 민영환과 한규설은 영어에 능통한 이승만을 밀사로 미국에 파견했다.

청년 이승만은 1905년 외교관 예복을 갖춰 입고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1882년의 한미조약에 의거하여 미국이 한국 독립을 위한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 외교는 성공하지 못했다. 미국은 이미 가쓰라-태프트밀약으로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실패한 외교를 통해 이승만은 나라를 살리는 길을 고민했다. 1910년 완성된 그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었다. 이승만은 이 연구를 통해, 대한제국이 열강의 전쟁에 끼어들지 않고 자주독립 할 수 있는 길은 '중립외교'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한시바삐 동포들에게 알리고자 그가 '상투론'을 썼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사람이 상투를 하도 숭상하니까 남들이 심심하면 와서 이놈도 쥐어보고 저놈도 쥐어봄에 차차 길이 들어서 내종은 뭇놈의 장난감에 한 손잡이가 되었지요. 싸움을 할 때 어떻게 하던지 상투 하나만 움켜쥐면 이리 끌고 저리 끌며 이것저것 다 빼앗을 수 있으니, 상투 때문에 손가락 발가락 까딱 못하고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스스로 나 죽었소 하는 꼴이 되어버렸오. 그러니 살기 위해 상투를 없애야 한다는 말이오."

그 무렵 상투는 머리를 길게 땋은 총각이 대략 15세가 넘어 장가를 갈 때 틀게 된다. 1895년 고종은 단발령(斷髮令)을 내리고 가장 먼저 서양식으로 머리를 깎았지만, 1898년 안국동에 문을 연 독일어학교(官立德語學校)에 다니는 학생들조차 여전히 상투를 틀고 있었다('꼬레아 에 꼬레아니'). 안동 지방에서는 한 신식학교 교사가 머리를 잘랐다가 다시 상투를 틀었는데, 의병의 습격 때 상투 덕분에 목숨을 건진 일도 있었다. '손발은 자를지언정 두발은 자를 수 없다'는 유교의 전통이 얼마나 뿌리깊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상투를 자른다는 것은 전통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동시에 다른 나라에 끌려 다니지 말고 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자는 호소이기도 했다. 이중적 의미를 띤 '상투론'을 통해 이승만은 '국민의 대각성'을 촉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