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12) "군수·면장·동장이 다 학교를 세우니…"

namsarang 2010. 1. 25. 17:37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12) "군수·면장·동장이 다 학교를 세우니…"

1909.8.29~1910.8.29

 

경북 예천군 맛질에 살던 박씨가의 일기 한 대목. "예안사람들이 만여냥의 돈과 8천석 추수의 논을 기금으로 13∼25세의 생도 백여명을 데리고 학교를 설립하였다"(1909.11.19) "함창 사람 이경주(李庚周)가 협천에서 학교를 크게 설립하여 학생이 많이 모였다"(1910.9.29). 전남 구례군 오미동(五美洞)에 산 유씨가의 일기 한 대목. "1910년 2월 12일 서당 설립 일로 마을에다 통문을 띄웠고, 2월 17일 방장학숙(方長學塾)이 개학하자 학생 수십인이 매일 지리·산수·국문·체조·운동 및 일본어를 박학하게 배운다."

당시 농촌 생활일기는 그야말로 비온 뒤 죽순 솟듯 전국적인 학교설립 붐을 전한다. 대한제국 말기, 식민지화의 위기 속에서 오히려 학교설립과 교육열기는 뜨거웠다. "자포자기(自暴自棄)하지 말고, 자국(自國)정신 수습하여, 교육·식산(殖産)·공업으로, 개명(開明)발달 목적일세." 1906년 평안도 용천군(龍川郡)에 광화(光華)학교가 세워졌을 때 학생들이 지은 송축가이다.

1894년 과거 폐지 이후에도 교육이 확대된 원인은 두 가지다. 첫째는 19세기 신분제의 동요로 교육이 평민층으로 확대됐다. 둘째는 개항 이후 근대문명의 충격으로 교육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자각이 높아졌다. 1907년 미국에서 돌아온 도산 안창호는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학교를 세울 것을 역설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나라의 주인입니다. 이제 이방인이 이 땅의 주인인 양 행세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모두 개화한다면 그들이 이 땅을 강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학교를 세워 무실역행(務實力行)하는 인재를 키워 봅시다."

학교가 급증하자 교원양성을 위한 1년 코스 학교도 생겼다. 함경도 유지들이 조직한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는 '황성신문' 1906년 12월 31일자에 학생(교사후보) 모집 광고를 냈다.

"본회에서 함경남북도 내 교육을 위하여 본관 내에 학교를 설립하고 속성으로 교사 배양에 주의하여 다음과 같이 광고하오니 경향(京鄕)을 물론하고 입학하기 바람. ▲연령 : 22세 이상~40세 이하 ▲독서 : 중용·대학·논어·맹자·역사 ▲작문 : 국한문 ▲산수: 초보 ▲과정 : 속성기한은 1개년으로 함."

당시 북한에서 활동한 한 선교사는 "지금 교육혁명이 진행 중이다. 기독교나 비기독교를 막론하고 학교들이 하룻밤 새에 생기곤 한다. 관찰사와 군수가 학교를 시작하고, 면장과 동장이 학교를 세우고 있다. 선생 한 사람을 놓고 서로 빼앗아 가려 한다. 봉급이 올라갔고 평양 숭실학교 졸업생이 때를 만났다"고 기록했다.

조선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민간이 설립한 초·중등교육기관인 서당은 1911년 1만6540개, 학생 수는 14만1604명이었다. 보성전문학교 등 조선인이 설립한 사립학교는 1910년 2225개였다. 개항 이후 교육보급도가 높아지고 학습 내용도 근대적인 것으로 채워졌다. 국가발전의 소중한 자산인 교육열은 조선시대에 씨앗이 뿌려져 망국의 위기 속에 싹트고 있었다.

                                                                                                              이헌창 고려대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