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14)14세 신랑과 침략 일본군
미국의 주간 화보 잡지인 '콜리어스(Collier's)'는 1904년 5월 7일자에 14세 한국 소년의 사진을 실었다. 평안북도 순안(順安) 한 마을 초가집 앞에서 정자관(程子冠·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쓰던 관)을 쓰고 팔짱을 낀 채 찡그린 얼굴로 서 있는 '어린 신랑'의 모습이다. 러일전쟁 후 일본군이 북으로 진격하면서 마을 장정들은 징용으로 끌려가고,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는 산속에 숨는 바람에 유일하게 마을에 남은 '어른'을 사진에 담았다고 한다. 잡지는 '꼬마 신랑'의 아내가 25세였다고 설명한다. 복장과 쓰고 있는 관으로 보아 시골 양반 가문이었음 직한 소년은 열살 이상 차이 나는 여성과 조혼(早婚)했음을 잡지는 전하고 있다.
"심하도다 조혼의 폐해여, 나라를 망하게 하고 민족을 멸하게 하는 것이 조혼이라"고 황성신문은 1909년 9월 4일과 5일 이틀에 걸쳐 통탄하는 논설을 실었다. "조혼 풍조로 인종은 감소하고, 인재를 결핍하게 하며 교육이 추락하며 산업은 쇠잔해진다. 젊은이의 의지와 기백이 박약해지고 가정의 화합도 깨진다"고 신문은 질타했다.
이보다 앞서 독립신문은 '국가에 제일 해로운 풍습이 조혼'이라고 설파했다. "골격이 자라기 전 아해들이 혼인을 하여 아이를 낳으니 그 자식들이 튼튼치 못하여 사람의 씨가 차차 줄어든다"면서 정부가 이를 금할 것을 주장했다(1896년 6월 6일자 논설). 정부도 폐해를 모르지는 않았다. 1894년 7월 갑오개혁 때에는 남자 20세, 여자 16세 이하는 혼인할 수 없도록 했다가, 1907년 8월에는 남자 만 17세, 여자 만 15세 이하로 결혼 연령을 조정했다.
그러자 밤에 몰래 혼례식을 치르는 '암혼(暗婚)'이 성행했다. 법부대신 조중응(趙重應)은 "암혼으로 낳은 아이는 사생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1910년 5월 경찰이 호적을 조사한 결과 조혼의 폐습은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다(대한매일·1910년 5월 31일). 일제 강점기에는 조혼타파를 외치는 소리가 더욱 높아진다.
"조선사람들은 남녀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서로 보지도 못한 채 혼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을 부모 마음대로 결혼하게 하니 어찌 원만한 가정을 이룰 수 있으랴. 하인을 얻을 때에도 그 사람의 얼굴과 인간됨을 먼저 알아보는 법인데, 평생을 같이하고 자식을 낳아 기를 상대를 보지 않고 결혼하니 우습지 않은가. 외국에서는 지각이 날 만한 성인이 된 후에 남녀가 만나 교제하다가 남자가 청혼하는 순서를 밟는 것이 풍습이며, 결혼을 하려면 아내를 먹여살릴 무슨 벌이를 가져야 염치 있고 경우가 서는 법이다."
조혼이 다른 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미개한 풍습임을 점잖게 타일렀던 1896년 독립신문 논설은 지금 읽어도 설득력이 있다. 곤혹스러운 표정의 '어린 신랑'과 거칠고 거만한 일본 군인들을 대비시킨 미국 잡지의 사진에는 '민족의 고난'이 투영되어 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정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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