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13) "동포 구제 팽개치고 일본관광 떠나는가"
국권이 풍전등화 같던 1909년 4월 15일 '대한매일신보'는 단체 외유를 떠난 '사회 지도급' 인사들을 질타하는 시평을 실었다.
"떠나갔네 떠나갔네 관광단이 떠나갔네. 동포 구제 고사하고 제 친족이 죽는대도 돈불고견(頓不顧見: 돌보지 않음)하던 심장 관광 여비 쓰려 하고 가사(家舍)까지 전당했네."
통감부 기관지 '경성일보'에서 '제1회 일본관광단'을 모집한 것은 그해 4월 초. 양반·유생·실업가 등에게 일본 문물을 시찰할 기회를 주어, 소위 '일선(日鮮·일본과 조선)융합'을 꾀하려는 목적이었다. 경비가 만만치않은 관광단에 누가 신청할까 싶었으나 예상을 뒤엎고 반응은 뜨거웠다. 당초 50명으로 계획된 관광단은 110명으로 늘어났다. 궁내부 대신 민영소, 시종원경 윤덕영, 한성은행 지배인 이승현, 제국신문사 주필 정운복 등 정치·경제·언론계 유력인사들이 빠지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앞다투어 이름을 올렸다.
1인당 100원이 넘는 관광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총리대신 이완용은 모금 운동을 벌이고 성금을 기탁했다. 당시 100원은 면서기 월급(30원) 석달치보다 많았고, 쌀 10석 이상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관광단이 출발하던 날 남대문정거장(지금의 서울역)에서 성대한 전별행사가 열렸다.
"관광단을 보내는 전별 특문(特文)이 반공에 솟아있고, 전별 깃발은 바람에 나부끼는데, 한편에는 군악이 자지러지고, 또 한편에는 각 대관들이 둘러섰더니 홀연 기차가 떠나가자 '관광단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더라."('대한매일신보' 1909년 4월 14일자)
그러나 떠들썩한 전별행사는 관변단체인 한성부민회에서 군중을 동원해 꾸민 연극에 불과했다. 외유를 떠나는 관광단에 대한 일반인의 시선은 따가웠다.
"묻노니 관광단이 외국의 문명을 수입하기 위해 가는가. 가로되 아니라. 산수 구경할 행락객이니라. 황명을 받아 사신 가는 행차인가. 가로되 아니라. 사사로이 인물 구경 가는 행인이니라."('대한매일신보' 1909년 4월 4일자)
관광단은 안내자의 깃발을 따라다니며 한 달 남짓 시모노세키·오사카·나라·교토·도쿄 일대 명승지와 산업시설을 둘러보았다. 귀국 후 이들의 행태는 더욱 가관이었다. '지도급 인사'들은 전국에서 강연회를 열어 "이번 여행으로 일본인이 한국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했으며, 한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통감부는 관광 한번 주선해주고 확실한 지지 세력을 확보한 셈이었다.
이후 관광단은 일본이 부일(附日) 인사에게 베푸는 시혜로 정례화되었다. 강제병합 직전 출발한 제2회 일본 관광단, 병합 직후 작위를 받은 70여명이 조직한 조선귀족 관광단 등이 일본을 다녀왔다. 친일 고관 부부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무덤을 참배하고 미쓰코시백화점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남의 돈으로 '관광성 외유'를 하고 돌아온 이들은 감격해 스스로 한일병합의 나팔수가 되었다.
전봉관 KAIST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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