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성지순례는 대개 종교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 관습이자 전통이다. 그리스도교에서 성지순례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성스러운 땅, 즉 성지와 순교자들 유해가 안치된 곳이거나 성인들 유적지인 성역을 방문해 경배를 드리는 신심행위를 말한다. 신자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들 성지를 찾아 축제와 예배에 참석하면서 그 장소에 얽힌 종교적 전승을 실존적으로 체험하고 자신이 속한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과 일체감을 확인하게 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하느님의 개입이 분명히 드러난 지역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둘러본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순례는 높은 데에서 우리를 굽어보시는 분이 아니라 동반자가 되어주신 하느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라며 성지순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모든 종교에서 영적 중심지로 가는 여행은 속죄와 정화, 새로운 삶으로 상승을 상징한다.
구약성경에서 순례는 개인이나 가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행되는 절기들에 참여하기 위해 연례적으로 떠나는 여행이 중심이 된다. 신구약에서 순례는 어떤 거룩한 곳으로의 여정을 의미한다. 구약의 순례는 약속의 땅에 정착한 이후 널리 행해진 예배 행위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스라엘의 중요한 공동체 예배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행해졌다. 유다인 남자들은 일 년에 최소한 세 차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순례자들이 여행했던 장소는 예배 중심지인 동시에 정치적 중심지였다. 순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성전에 올라가는 15개 시편에서 잘 나타난다(시편 120~134장).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의 순례에 대한 성서적 원형은 아브라함이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12,1-3).
따라서 믿음의 삶이란 처음부터 순례의 길로서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해 환시로 받은 말씀을 전하면서 순례를 미래의 구원과 연관지어 묘사하고 있다(이사 2,2-4).
복음서에서 순례 이미지는 특별히 예루살렘을 향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여행에서 강조된다. 복음서는 또한 예수님을 순례자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선언한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신약성경은 순례자 이미지들을 통해 신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 삶을 강조하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갔던 성경의 성조들을 언급하기도 한다(히브 11,8-10). 또한 신자들 공동체는 보통 격리되고 핍박받는 유배생활을 많이 했기 때문에 나그네나 행인으로 묘사되기도 했다(1베드 1,17).
시공을 초월해서 하느님을 따르는 충성스러운 신자들은 상징적 의미에서 순례자들로 묘사된다. 이 세상이 바로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이며, 신자들은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여행 중에 있는 백성들이다. 따라서 순례자는 현세 고통을 넘어서 미래 희망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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