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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전하께서 일본 동경에 계셔 사슴을 사냥하신 것과 운동하신 것을 덕수궁에서 각부대신들과 함께 활동사진으로 어람구경하였다더라.'
순종 황제는 '문명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이등박문이 일본으로 데려간 황태자 영친왕의 활동 모습을 보면서 크게 기뻐한다. 이 활동사진은 애국부인회에서 주선한 것으로 이해 6월 관인구락부에서 일반에게도 공개되어 대중적 관심을 끌게 된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한 장면을 촬영한 활동사진도 화제가 된다.
'이등 공이 합이빈에서 변을 당하던 활동사진은 로국 사람 일명이 그 광경을 사진 박은 것인데, 로국 탁지대신과 이등 공이 회견한 모양과 안중근이가 뛰어 나와 7연발 단총으로 이등 공을 습격하던 광경과 비서관 고곡등의 엎드러지던 광경을 역력히 사진을 박았으매, 각국인이 다투어가며 그 사진을 사는데, 일본에 있는 영자신문 자판프레스 신문사원 뢰모목 씨가 일만 오천 원에 그 사진을 사서 내월 십일에 동경으로 가지고 온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 11. 21.)
- ▲ 태황제 고종.
이듬해 이 활동사진이 서울에서도 상영되었다는 뉴스는 놀랍다.
'작일 하오 칠시에 창덕궁 인정전에서 이등씨에 관한 활동사진을 설행하고 대황제 황후 양폐하께옵서 어람하셨는데 각 황족제씨는 부인과 같이 참여하고 대신 이하 고등관 제씨도 모다 참여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1910. 2. 3.)
순종의 활동사진 구경은 한두 달에 한 차례씩 심심치 않게 이루어지는데, 태황제 고종도 이를 즐겼다. 고종이 궁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사진 상영에 이완용의 부인 조씨를 초대하고 그 집안 부녀자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구경하라 하여 부녀자 68명이 함께 궁에 들어가 활동사진을 구경하게 되었다는 기사('신보',1910.6.5.)도 등장한다.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특별공연에 총리 부인과 여성인사들을 초청한 셈이다.
이 시기 활동사진은 요즘의 영화와는 다르다. 일종의 기록 영상물이라고 할 수 있는 짤막한 단편 필름으로, 주로 세계 각국의 풍물을 소개하는 내용이 많았다. 본격적인 영화가 등장하기 전 그 신기함에 오락적 흥취가 덧붙여지면서 새로운 흥행물로 자리잡게 된다.
활동사진 상영 광고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이다. '동대문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하는데, 매일 하오 8시에서 10시까지이며, 구미 각국의 절승을 모아 놓고 있으며 입장료는 10전'이라는 내용이다. 이후 활동사진은 사진 속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희한한 구경거리'로 알려지면서 크게 성행한다. 대중 공연장인 연흥사가 활동사진 상영을 위해 시설을 확장하여 전기불로 오채가 영롱하게 되었고, 장안사는 일본인과 계약하여 새로운 활동사진을 공급받게 되었다. 위로는 황제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 활동사진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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