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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시대에 우리나라 선왕이 내조한 것은 역사상에도 전무하거늘 일개 인형공장이 무근거한 괴괴한 인형을 망조(妄造)하여 이웃나라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는데 관청에서 보고도 못 본 체하니 이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1906년 10월 27일 일본 유학생 이우진(李祐珍)과 류승흠(柳承欽)은 산책 도중 도쿄의 한 인형 제조점에 들어갔다가 괴이한 인형을 발견하였다. 구막부의 도쿠가와(德川家康) 쇼군에게 우리나라 선왕이 납공 내조하여 뜨락 아래에 엎드려 절하고 있는 형상의 인형이었다. 이에 분개한 두 유학생은 경찰서로 찾아가 경찰서장에게 항의하였던 것이다.
'인형을 속히 처분하라'는 한국 유학생들의 요구에 일본 경찰은 두 학생의 충절을 칭찬하면서 인형의 매매를 금지하는 한편 그러한 기괴한 인형을 제조하지 못하도록 하는 엄령을 내렸다. 유학생들의 역사 왜곡 시정 요구에 어떻게 일본 경찰이 선뜻 받아들여 처리할 수 있었을까? 유학생들은 '국제상 교의에 위반'되므로 '한일 양국의 돈의를 생각하여' 인형을 처분해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일본 유학생들이 간행하던 태극학보는 이들의 지혜로운 행동을 '양씨 의거'라는 제목으로 제4호(1906년 11월 24일)에 게재하였다.
태극학보 제11호(1907년 6월 24일)에는 이와 유사하게 한국인을 모독하는 '박람회 내 한국 부인 사건'의 전말이 게재되었다. 당시 대성황을 이룬 도쿄 권업 박람회장 조선관 안에는 관람용으로 한국인 부인 1명과 통역 1명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 모델은 '천업에 종사하는 여인 복장인 데다가 붉은 연지를 덕지덕지 발라 각국 관람인으로 하여금 일종 괴괴(怪怪)한 관념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본 한국인 유학생들이 놀라 조선관 책임자에게 항의하니 한국 여인을 고용하여 그렇게 한 것인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식으로 대답했다.
이에 '몇 년 전 오사카박람회에서 간상배가 한국 부인 2명을 야만 인류관에 두고 관람료를 받았던' 사례와 다를 바 없다면서 한국의 '체면을 손상'하는 '중대한 모욕'이므로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계약을 해지하고 여인을 귀국시키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내부 참서관 민원식(閔元植)이 마침 일본에 와 있다가 유학생들로부터 이 소식을 듣고 수백 원을 일본인에게 지불하고 한국 여인을 귀국시켰다. 일본인들은 한국을 천박하거나 야만적인 사회로 보고, 박람회장에 한국인을 모델로 고용하여 구경거리로 삼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유학생들이 힘을 합쳐 한국인이 모욕당하는 사태를 막아낸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 일본의 근대 문물을 배우러 갔던 유학생들은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의 일제강점기 행적은 실망스러웠다. 류승흠은 일제에 적극 협력하여 중추원 참의에까지 올랐다. 민원식은 친일여론 조성에 앞장서 참정권 운동을 벌이다 도쿄에서 양근환 의사에게 처단당하였다. 젊은 시절의 순수한 뜻을 오래 지키기 어려움을 이들의 삶에서 새삼 느끼게 된다.
1906년 10월 27일 일본 유학생 이우진(李祐珍)과 류승흠(柳承欽)은 산책 도중 도쿄의 한 인형 제조점에 들어갔다가 괴이한 인형을 발견하였다. 구막부의 도쿠가와(德川家康) 쇼군에게 우리나라 선왕이 납공 내조하여 뜨락 아래에 엎드려 절하고 있는 형상의 인형이었다. 이에 분개한 두 유학생은 경찰서로 찾아가 경찰서장에게 항의하였던 것이다.
- ▲ 도쿄 권업 박람회장
태극학보 제11호(1907년 6월 24일)에는 이와 유사하게 한국인을 모독하는 '박람회 내 한국 부인 사건'의 전말이 게재되었다. 당시 대성황을 이룬 도쿄 권업 박람회장 조선관 안에는 관람용으로 한국인 부인 1명과 통역 1명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 모델은 '천업에 종사하는 여인 복장인 데다가 붉은 연지를 덕지덕지 발라 각국 관람인으로 하여금 일종 괴괴(怪怪)한 관념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본 한국인 유학생들이 놀라 조선관 책임자에게 항의하니 한국 여인을 고용하여 그렇게 한 것인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식으로 대답했다.
- ▲ 내부 참서관 민원식
- (閔元植)
대한제국 시기 일본의 근대 문물을 배우러 갔던 유학생들은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의 일제강점기 행적은 실망스러웠다. 류승흠은 일제에 적극 협력하여 중추원 참의에까지 올랐다. 민원식은 친일여론 조성에 앞장서 참정권 운동을 벌이다 도쿄에서 양근환 의사에게 처단당하였다. 젊은 시절의 순수한 뜻을 오래 지키기 어려움을 이들의 삶에서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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