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58] 합방의 나팔수 '국시유세단'

namsarang 2010. 3. 12. 23:48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58] 합방의 나팔수 '국시유세단'
 
1909. 8. 29.~1910. 8. 29.
                                                                                                                                                                                                                                   
                                                                                                                                                                       박기주 성신여대 교수·경제학
 

1909년 7월 27일 연흥사(현 종로구청)에서 국시유세단의 발기회가 있었다. 위원 26명 중 임시회장에 정응설, 규칙제정위원에 신광희, 예종석, 고희준이 선정되었다. 8월 2일 총회가 열리고 단장으로 이용직이 선출된다. 같은 달 초 일본 내각은 '대한정책 확정의 건'을 천황으로부터 재가받고 적당한 시기에 합방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런 정세 속에서 이완용, 조중웅 등 친일 집권파와 송병준, 이용구 등 일진회 사이에 친일 경쟁이 가속화되었다. 당시 이토가 막 통감직을 사퇴한 터라 그를 의지하던 총리대신 이완용은 위축된 반면, 일본 내 합방론자와 맥이 닿아 있던 일진회는 합방방침에 한껏 고무되었다. 이에 이완용이 일진회를 견제하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등장시킨 것이 '국시유세단'이다.

국시유세단의 주도자는 고희준(황성신문 1909년 7월 25일자에 실린 고희준의 강연 광고)이다. 그는 일본 유학을 하고 독립협회에도 참여하였으며 거제군수를 거쳐 1909년 진남군수로 있었다. 이때 송병준과 인연을 맺어 일진회에 가입하였으나 곧 탈퇴하고 이완용 휘하에 들어갔다. 유세단 발기회 전날 원각사에서 행한 연설에서 고희준은 "이토의 '동양평화론'에 바탕하여 한국은 동양평화와 세계안녕을 위해 일본에 의지해야 하고 양국의 이해가 같다"고 주장했다.

▲ 대한민보 9월 1일자에 실린 풍자만화는 중절모를 쓴 유세단원들이 유성기까지 동원해 갓 쓴 사람을 잡아끄는 모습을 그렸다.〈큰 사진〉 ,국시유세단의 주도자는 고희준(황성신문 1909년 7월 25일자에 실린 고희준의 강연 광고)이다<작은사진>.

이완용은 국시유세단에 400원을 기부하였고 통감부도 4~5천원을 냈다. 유세단은 전국에서 연일 유세를 벌였다. 일진회가 합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자 선수를 놓친 이완용은 유세단을 통해 일진회를 규탄하지만 그것은 합방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합방론의 주도권을 다투기 위해서였다. 대한매일신보는 '국시유세단도 일진회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아첨하고 매국하려는 것'(1909.8.6.)이며 '공교한 말로 장황하게 연설하나 국민 이목을 현혹하고 국혼을 박멸하는 사귀(邪鬼)'라고 비판했다.

대한민보 9월 1일자에 실린 풍자만화는 중절모를 쓴 유세단원들이 유성기까지 동원해 갓 쓴 사람을 잡아끄는 모습을 그렸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손사래를 치며 코를 막고 자리를 뜨는 것은 유세단에서 매국의 구린내가 나는 까닭이다. 합방의 나팔수였던 유세단 규모는 5~6백명에 달했다. 유세단원에게 지급된 일당 때문에 가입하는 자가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승용씨는 본래 완고한 양반인데 국시유세단으로 지방에 파송되면 매일 5환 여비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 궁한 선비의 하책(下策)으로 유세단에 가입하여 두발을 자르며 지방에 파송되기를 고대하는데 병으로 인하여 유세를 정지하매 5환 여비는 기약할 수 없게 되고 생계는 갈수록 곤궁한지라. 때때로 상투 자른 머리를 어루만지며 탄식하여 가로되 '이놈 팔자에 매일 5환이 어찌 생기리오' 한다더군. 안 되는 놈은 자빠져도 코가 깨져.'(황성신문 1909.10.2.)

대한매일신보 사설은 '붓을 잡아 글을 쓰는 자나 혀를 둘러 말을 하는 자의 태반이 유세단이니 저 허다한 유세단을 이 붓으로 모두 토죄코자 하면 동해의 물을 말려도 겨를이 없을 것'이라며 한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