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60] 합방에 반대한 친일 정치가 유길준

namsarang 2010. 3. 14. 15:21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60] 합방에 반대한 친일 정치가 유길준
 
1909. 8. 29.~1910. 8. 29.
 
                                                                                             전봉관 KAIST 교수·한국문학

 

"이완용씨는 유길준씨를 찾아보고 '후임이 되라'고 하였다는데, 유씨는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 내각은 정치상 실권은 없고 빈자리만 지키고 있을 뿐이니 이것은 노예 되는 사람이나 할 것이지, 나는 노예 노릇하는 내각은 원하는 자가 아니노라' 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 9. 28.)

1907년 8월, 12년간의 일본 망명을 마치고 귀국한 유길준(1856~1914)은 개각설이 제기될 때마다 총리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그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고도 3번이나 고사할 만큼 출세에는 뜻이 없었다. 그 대신 흥사단, 노동야학회〈작은 사진〉(1908년 펴낸 노동야학독본), 한성부민회 등을 조직해 교육, 지방자치, 상공업 육성에 주력했다.

▲ 1907년 8월, 12년간의 일본 망명을 마치고 귀국한 유길준(1856~1914)<사진 왼쪽>, 노동야학회에서 1908년 펴낸 노동야학독본.

유길준은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개화사상에 심취한 이후 과거제도의 폐해를 깨닫고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같은 개화파인 김옥균, 홍영식 등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것과 다른 행적이다. 유길준은 동문수학하던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의 주선으로 1881년 조사시찰단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가 복택유길(福澤諭吉)이 설립한 경응의숙(慶應義塾)에 들어가 한국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 1883년에는 보빙사(報聘使) 수행원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덤머 아카데미(Governor Dummer Academy)에 입학해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라는 기록도 남겼다. 하지만 1884년 12월 개화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하는 바람에 강제 소환돼 8년여 연금 생활을 했다. 이때 복택유길이 쓴 '서양사정'을 참고로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한다.

유길준은 39세 되던 1894년 친일 내각이 들어선 이후에야 관직다운 관직을 얻어 갑오개혁을 주도했다. 그가 출간한 '서유견문'을 고종과 고관들에게 기증해 개혁의 지침서가 되기를 바랐지만, 곧 실각하는 바람에 큰 영향은 끼치지 못했다. 다만 학교 교재로 사용되거나 '독립신문' '황성신문'에 인용되어 개화사상 보급에 기여했다. 유길준은 내부대신으로 단발령을 시행하면서 손수 가위를 들고 세자의 머리를 깎아 원성을 사기도 했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판사의 영장 없이는 국왕이라도 사람을 체포할 권한이 없다"고 버틴 일화도 전해진다.

유길준에게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한 스승이었다. 그는 '일본이 병자수호조규(1876) 이후 일관되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왔지만, 한국 정부가 일본을 믿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한국이 부강해지면 일본은 물러날 것'(유길준, '평화극복책')이라며,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을 '경거망동하는 폭도'라 비난했다. 그러나 일진회가 일본에 '한일합방'을 청원하자, "일본에 부속하면 어찌 황실과 인민이 있겠느냐"며 도리어 일진회를 꾸짖었다. '친일파'라고 모두 합방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합방 이후 일본은 유길준에게 남작 작위와 은사금 5만원을 수여하지만, 유길준은 남작 작위는 거부하고, '은사금'만 수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