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62]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의 신출귀몰

namsarang 2010. 3. 16. 19:52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62]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의 신출귀몰
 
1909. 8. 29.~1910. 8. 29.
                                                                                             김기승 순천향대교수·한국사

 

▲ 신돌석
사람들은 신돌석하면 '신출귀몰, 축지법, 평민 의병장, 태백산 호랑이' 등의 단어를 떠올린다. 그는 '1906~1908년 사이 경상도 영덕을 중심으로 격렬한 의병 전투를 펼친 민족의 영웅이자 신화의 주인공'이었다(김희곤, '신돌석; 100년 만의 귀향'). 영덕에서 태어난 (신돌석의 생가) 그는 1906년 22세 때 고향의 주점 앞에서 거병하여 의병대장이 되었다. 자수성가한 아버지가 재산을 털어 군자금을 마련해 주었다('의병대장 신공유사', '신장군실기').

신돌석 부대는 농민·보부상·어민들이 중심이었지만, 양반 유생들도 지도부로 참여하여 평민 의병장의 지휘를 받았다. 신돌석이 어려서 퇴계 후손 진성 이씨 가문의 서당에 다닌 적이 있어 양반을 친구로 사귀어 그들의 신망을 얻었던 것이다. 신돌석 부대는 여러 별동 부대로 나뉘어 활동하기도 하고 이강년 부대와 연합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백두대간의 태백산·일월산·백암산을 따라 남북으로 이동하기도 하고 동해안의 울진 평해 영덕을 오르내리며 일본군 부대를 공격했다.

▲ 신돌석의 생가.
초기에는 산간의 촌락에서 주민들과 함께 숙식했으나 후기에는 산중에 구축한 여러 곳의 요새에서 묵었다. 하루에 대략 90리(약 36㎞) 정도를 이동하는 기동력으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의병들이 '술에 뜻을 두지 않았고, 별로 불평할 만한 점도 없을' 만큼 규율있는 탄탄한 조직이었다. 일제가 편찬한 '폭도사편집자료'(1908.10.1.)는 이렇게 전한다.

'신돌석이 화적의 수괴가 되어 혹은 독립하고 혹은 다른 집단과 연합하여 영양·영덕 지방을 근거로 하여 본도(경상도) 북부는 거의 횡행하지 아니한 곳이 없다. 그는 경찰대·수비대·헌병대에 의하여 토벌당한 일이 수십 차례였으나 실로 출몰이 자재하여 용이하게 체포되지 않고 있다.'

1907년 9월 신돌석 의병은 영양 동북부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맞섰는데, 동쪽으로 나가는 척하다가 신속하게 북상하여 포위망을 벗어났다. 일본군은 11월 15일부터 40일간 삼척과 울진 방면에서 남하하면서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이 기간 신돌석 부대는 일월산과 백암산 사이에 웅거하다가 작전이 종료된 1월 1일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였다. 또 1908년 2월 영주의 일본군이 6개 부대로 포위하여 6일간 생포 작전을 펼쳤는데도 신돌석 부대는 유유히 포위망을 벗어났다.

이 작전이 실패하자 일본군은 장군의 부인과 아들을 안동에 30일간 인질로 잡았다. 이 유인 작전에 신돌석이 걸려들지 않자, 일본군은 그에게 전할 편지를 주며 가족을 풀어 주었다. 그 후 부인을 만난 신돌석은 부인을 훈계하며 편지를 읽지도 않고 불에 태웠다(김희곤, 앞의 책).

수많은 전과를 올린 신돌석 부대는 1908년 겨울로 접어들자 후일을 기약하며 일단 해산했다. 해외 이동을 모색하기 위해 친척을 찾았던 그는 동지였던 그들의 손에 12월 12일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평민으로 태어나 평민과 양반을 하나로 묶어 항일투쟁에 온몸을 던진 그는 민중의 가슴에 '신화'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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